언론은 소통의 중심, 민주주의의 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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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jmoon5274
  • 승인 2008.09.2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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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소통의 중심, 민주주의의 근간

 


류교열(언론사주간교수)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잘못된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면, 그 나라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을 보면 이러한 일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능력 없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 이상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오르게 되면, 자신의 힘으로 채울 수 없는 부족한 부분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소통과 동조가 없다면 결국 이 부족한 부분은 거짓과 위선으로 채워지게 되고, 결과는 파탄이다.
  무능한 권력은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행위를 용납하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 또 자신이 전능하다고 생각하며, 타자=피지배자의 모든 것을 해석하고 정의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과신한다. 선배는 후배를, 교수는 학생을, 검사는 피의자를, 의사는 환자를, 남성은 여성을, 강자는 약자를, 서양은 동양을, 제국은 식민지를 해석하고 정의한다.
  하지만 가끔 권력은 불안하다. 자신의 생각과 불일치하는 피지배자의 행위 때문이다. 그럴 때면 권력은 이런 피지배자의 행위를 자기 해석의 틀 속에다 억지로 끼워 맞추며 불안을 해결한다. 그래서 소통의 중심인 언론은 장악의 대상이고, 검찰과 경찰은 권력의 시녀가 되며, 촛불은 좌익으로 해석되고 탄압의 대상으로 정의된다. 진실과 주체적 삶을 위협하는 허위의식은 이렇게 생산된다. 이쯤이면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는 충분히 위기에 처했다고 하겠다.
  권력은 피지배자나 소수자, 약자에게 희생과 굴욕을 강요하고, 시간이 흘러 기정사실을 쌓아올리기만 하면 끝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을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다. 권력 앞에 선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과 주체적 삶을 위한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으려는 노력에 있다. 권력이 만들어 내는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진실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갑이나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온갖 호들갑을 피우면서 찾으려 애를 쓴다. 그러나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에 대해서는 찾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종종 허위의식에 동조하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겸손’과  ‘무지’를 이용한다. 지적 직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식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니에요. 저 같은 사람이 뭐…’라며 겸허를 가장해 몸을 낮춘다. 하지만 그것은 지적 특권을 누리면서 ‘지식인’이 떠안아야 할 사명과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보신의 몸짓에 다름 아니다.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이러한 행위가 ‘의도적 태만’이며 또한 명백한 범죄행위임을 고발한 바 있다. 레비가 쏜 고발의 화살은 이 시대에 과연 누구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우리 주변에는 도처에서 인간들의 소통과 연대에 실패하고 있다. 자신의 연약함과 비겁함, 그리고 우매함 때문에 그로부터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의도적인 태만이다. 파국의 시대를 살면서 허위의식의 외줄에 얽혀 있음을 당연시하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국민’의 세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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