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과 페이스북의 사회학: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카톡과 페이스북의 사회학: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 권경우(문화평론가)
  • 승인 2012.09.07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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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817일 서울 강남에서 한 여고생이 자살을 선택했다. 그 이유로 밝혀진 것이 카톡이라는 공간에서 16명의 남학생으로부터 집단 욕설을 들은 것이라고 했다. 이 사건이 충격적인 이유는 그 동안 학교나 또래 집단에서 일어났던 왕따 혹은 집단 따돌림과는 또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카톡이라는 SNS(Social Network Services) 공간에서 비롯된 사건이었고, 그 반응은 매우 즉흥적이었다. 이것은 SNS 공간이 갖는 독특한 물질성을 상징한다. 만약 카톡이 아니라 문자를 통해 16명으로부터 욕설을 한꺼번에 들었더라도 그 학생은 자살을 했을까? 예를 들면 개별적으로 욕설을 듣는 것과, 동일한 공간에서 집단 공격을 당하는 것은 그 폭력의 강도가 훨씬 증폭된다고 봐야 한다

 

카톡 때문에 자살하는 현실

스마트폰 유저는 대부분 카톡이라는 어플을 설치해서 사용한다. 카톡의 편리성과 유용성은 이미 수 천 만 명 이상의 이용자들이 검증한 것이다. 문자처럼 비용이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화창에서 채팅이 가능하다. 또한 상대방의 수신 여부를 확인함으로써 기다림의 시간을 없애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은 오히려 카톡의 문제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 카톡을 지우는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거부하는 이들이다. 내가 답장을 하지 않는 것은 나의 권리에 해당되는데, 카톡은 수신확인 기능으로 인해 암묵적 답장을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채팅이 가능한 장점은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번거로움과 불편함을 주고 있다. 용건을 주고받기보다는 주로 이모티콘을 이용한 감정 표현이나 사소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자칫 실시간 대화를 놓치게 되면 사후적으로 시간과 감정에 있어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카톡을 사적 도구로 인식하거나 일부러 확인을 소홀하게 하기도 한다. 이는 카톡이 지닌 문제와 한계, 대처방식 등이 종합적으로 담겨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카톡은 보이스톡이나 게임 등 새로운 서비스를 출시하면서 현재에도 진화 중이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 유저들은 대부분 카톡에서 많은 것들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카톡이 직접적인 교감이나 대화를 하는 문자에 가까깝다면, 페이스북은 그야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타인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페이스북의 등장은 새로운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트위터 역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최근 공지영(소설가)씨와 하종강(성공회대 노동대학장) 교수 사이에 벌어진 <의자놀이>를 둘러싼 논란도 트위터가 갖는 한계를 잘 보여준다. 본질적인 문제보다도 결국 공지영씨가 트위터에 올린 감정 섞인 멘션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처럼 트위터의 공격적 본성과 140자라는 글자수의 압박은 결국 근본적인 한계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페이스북은 무엇보다 현대사회와 대중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동시에 지극히 미국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미국인들은 자본주의의 변화를 철저하게 내면화시킨 사람들이다. 최근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주요한 코드 역시 마찬가지다. 부자와 성공 담론, 자기계발 이데올로기와 긍정심리학, 그리고 최근의 힐링 담론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흐름은 사실 미국식 담론을 차용한 것들이다. 미국인들은 굉장히 비판적인 부분에 관대하고 여유로운 듯하지만, 오히려 너무 진지하거나 심각한 비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그런 걸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잘 간직하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긍정심리학은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주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기반을 갖고 있는데, 그러한 긍정심리가 아주 잘 드러난 것이 바로 페이스북의 좋아요기능이다. 흥미로운 점은 유튜브에는 좋아요/싫어요기능이 있고, 대부분의 인터넷 댓글에도 찬성/반대형식이 있지만, 페이스북에는 싫어요기능은 없고 오직 좋아요뿐이다. 페이스북은 기본적으로 친구(friend)’ 관계만 있다. 싸이월드의 일촌 개념과 유사하다. 굳이 일반화하자면 한국은 가족중심이고 미국은 친구중심이라고나 할까? 선배나 후배, 선생과 제자, 직장상사와 직원 등의 사회적 관계, 심지어 가족이라 할지라도 여기서는 모두가 친구이다. 사람들은 친구들의 게시글에 대해 열심히 좋아요를 클릭한다. 물론 댓글 기능도 있다. 하지만 댓글의 수에 비해 좋아요의 클릭 수는 월등하다.

 

페이스북, ‘좋아요만 있는 긍정의 공간

특히 좋아요기능은 댓글을 달기에는 좀 거시기한상황에서는 훌륭한 알리바이가 된다. 즉 상대방의 생각이나 활동에 대해 동참과 공감, 지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무감을 지닌 참여이다. ‘나는 당신을 지지합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며 함께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한편으로는 이런 뜻도 담겨 있다. ‘마음은 함께 하고 싶지만, 현실적인 물리적 공간에서는 어려울 것 같아요.’ 이러한 좋아요기능은 현대사회에서 늘어나고 있는 기부문화와 비슷한 형태와 성격을 갖는다. 포털사이트에서 도토리을 모아 기부하거나, 혹은 포인트를 통해 기부하는 것처럼 내가 굳이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충분히 기부라는 실천에 동참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활동이나 제주도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운동이나 경기도 두물머리 유기농지 수몰 반대활동 등 다양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에 대해 다른 사람의 말이나 활동을 좋아요로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마음의 부채를 갚는 방식이다. 비록 나는 어쩔 수 없이 먹고 사느라 직접 동참할 수는 없지만 마음만으로는 지지를 표현하고 싶다면서 말이다. 또한 좋아요를 누르는 행위에는 내가 당신에게 지지를 표시했으니, 당신도 내 글이나 활동에 대해 마찬가지로 지지해 주세요라고 하는 보상심리가 담겨 있다. 그것은 일종의 품앗이활동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아요를 열심히 누른다. 그들도 내 글을 눌러주기를 바라면서, 혹은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

그런데 문제는 좋아요라는 기능이 부정성을 삭제한 채 긍정성만을 남겨 놓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보니 페이스북은 매우 깨끗하고 깔끔한 공간이 된다. 인터넷 댓글이 진흙탕이라면, 그리고 트위터에서는 크고 작은 싸움이나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면, 페이스북은 사실상 그럴 일이 거의 없다. 이 곳에서는 친구들끼리만놀기 때문이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칭찬한다. 친구 아닌 사람들, 즉 차이와 부정을 전제로 하는 관계는 끼어들 틈이 없다. 그 결과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보고 싶은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20124월 총선에서 일부 진보적인 정당에서 그런 오류를 범했다. 적어도 정당 지지를 꽤 많이 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상은 참패에 가까웠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근거로 그런 생각을 했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긍정과 부정이 만나는 현실에서 나의 삶을 창조하라

페이스북을 벗어난 현실은 전혀 다르다.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도 들어야 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만나야 한다. 때로는 진흙탕에도 들어가야 한다. 거부와 부정, 배제의 양상은 빈번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그런 게 없다. 오직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긍정의 공간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 우리가 페이스북에서는 좋아요라는 표현으로 담아내기에 애매한 것이나 그럴 수 없는 것들이 거북스러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은 긍정과 부정의 교합으로 이루어진다.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들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질병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 한편으로는 사회가 너무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다 보니까 다른 한편에서 현실의 고통과 아픔을 삭제해버린 깨끗하고 깔끔하고 긍정적인 공간을 창출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이 결코 우리의 삶을 책임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열심히 좋아요를 누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좋아할 수 있는, 그리고 남들에게도 좋은 그런 일들을 내 손으로, 내 발로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작업과 활동, 생각들이 결국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내 삶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 변화야말로 결코 쉽지 않은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혼란과 싸움, 혼돈과 복잡 등을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권경우 문화 평론가 (문화사회연구소연구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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