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 청년에게 보내는 ‘노년에게서 얻은 지혜 하나’
중년이 청년에게 보내는 ‘노년에게서 얻은 지혜 하나’
  • 연극인 유미희
  • 승인 2012.10.1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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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연극 <철수와 영희를 위한 콘서트> 해양대 특별공연

3월이었다. 봄기운이 땅을 뚫고 오르고 있었으나 바람 속에는 아직 겨울 냄새가 묻어나던 3월, 어느 날이었다. 한 무더기의 청년들이 지금은 사라진 광복동 소극장 실천무대를 가득 채웠다. 그들은 <철수와 영희를 위한 콘서트> 특별 공연에 온 청년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제복을 입은 이들도 있었고 10대를 벗어났을까 말까 하는 어린 친구들도 보였다. 보통 단체 관람 관객들에서 보여지던 획일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다양한 이미지가 특이했다. 그들과 함께 1시간 40분 동안 극중극과 콘서트를 풀어갔다. 여느 때처럼...

그런데, 여는 때와 다른 것이 있었다. ‘청년 관객 100%’라는 사실이다.

보통, 객석에는 여러 세대가 섞여 있다. 연극을 통해 우리는 청년들에게는 응원을, 4050세대에게는 반성과 성찰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세대를 걸쳐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을 일컫는 ‘철수와 영희’들이 세대 공감을 하고 세대 연대로 나아가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설계하기를...그런데, 100% 청년 관객이라니.

관객은 무대 위 상황만이 아니라 그에 반응하는 이웃 관객의 반응으로부터도 자극 받고 상호작용하며 작품을 완성해 가는 존재다. 그래서, 연극 관람은 어떤 이웃 관객을 만나는가가 중요하다. 애석하게도 해양대 관객들은 다른 세대의 이웃 관객을 만나지 못했다. 그만큼 무대 위에 서 있는 나의 무게감은 커졌다.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우리 세대가 짊어져야 할 책임과 성찰을 나눠 가져 줄 관객이 없다는 부담감이었다. 이럴 때 배우는 외롭다. 그러나, 수줍은 듯 조심스럽기도 하고 청년의 발랄함과 진지함이 고루 섞인 해양대 학생들과 함께 한 공연은 ‘좋아요’로 기억된다. 이번엔 무대가 아니라 글이다. 여전히 나는 그때와 같은 이유로 약간 무겁다. 그러나, 지난 3월의 인연들에 대한 궁금함과 세대소통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크기에 약간의 부담을 즐겁게 떠안으려 한다.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꼰대의 훈수두기가 아니라 무언가 꿈틀거리는 이야기 거리가 되길 바라며...

 

‘죽을 때까지 변화가능하다’는 진리가 주는 희망

나는 ‘긍정의 힘’보다는 ‘긍정의 배신’을 통찰하면서 산다. 그렇다고 냉소와 절망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절망의 경험에 묶여 현실을 냉소하는 삶의 태도를 싫어한다. 그러한 태도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을 뿐더러 종종 타인의 희망을 착취하는 비겁한 행위임을 내 찌질한 삶의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늘 희망의 씨앗을 찾아 나선다. 때로는 책에서, 때로는 일상에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또 세상 가장 암담한 영역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최근에 또 하나의 희망의 씨앗을 발견했다. 발견 장소는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농성장이다.

산비탈 곳곳에 얼기설기 엮어 놓은 농성장은 사실 절망의 장소이다. 그곳을 지키는 이들은 70년 80년을 산 노인들이다. 희망은 그들 속에 산다. 그들의 사연은 대충 이렇다.

 

송전탑의 어두운 그림자

어느 날 한전에서 연락이 왔다. 송전탑이 들어선다. 송전탑이 서야 할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법에 따라 임대료를 받거나 팔고 나가시라. 그런데, 765kv 초고압 전기 선로가 머물다 가는 송전탑 주변에는 사람 이 살아서는 안 된단다. 이미 765kv 송전탑이 들어선 지역에 탐방을 가보니 가축들이 기형아를 낳고 벌 나비가 날지 않아 곡식도 안 되고 사람들은 시름시름 앓았다. 그들은 모두 노인들이었다고 한다. 밀양을 지나는 송전탑은 신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서면 수도권으로 보낼 전기 선로가 필요해서 온단다. 그런데, 송전탑 경로를 정한 기준은 터무니없었다. 지역 유지의 땅을 피해 노인들의 땅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노인들에게 집과 땅은 나고 자란 고향이고 생존의 터전이다. 때로는 건강이 좋지 않아 산골짜기로 요양 온 노인들도 있었다. 노인들은 한전에 집과 땅을 팔 수 없다고 했단다. 그러면 되는 줄 알고. 그런데 한전은 합법 운운하며 공사를 밀어붙이려고 했다. 대명 천지에 무슨 이런 일이 있나 싶었단다. 알고 보니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 전이 필요하면 무조건 집과 땅을 빼앗아 갈 수 있는 법이 있더란다. 박정희 유신 정권이 만든 ‘전원 특별법’이 그것이다. 그리고 7 년간의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74세 된 노인이 ‘내가 죽어야 해결되겠다’ 며 분신 자결했다. 그 이후로 노인들은 송전탑 공사 현장마다 농성장을 세우고 ㄱ자로 굽은 허리를 하고선 지팡이 짚고 매일 조를 짜서 산중턱에 있는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내 삶의 기억 속에는 참 많은 농성장이 있었다. 대학 다닐 때 학원 민주화를 위한 단식 농성장을 시작으로, 내가 주인이었던 농성장과 연대차 방문했던 농성장까지 손가락 발가락 다 세어도 모자란다. 그런데, 이렇게 농성장의 주인이 노인들인 경우는 없다. 그것도 산 속에.

“나는 평생 1번만 찍었다 아이가”

한 할머니가 주름지고 마디 굵은 손으로 내 손을 마주 잡으며 간절히 말씀하신다.

“보소. 젊은 양반. 우짜든지 투표를 잘 해야겠더라고. 나는 평생 1번만 찍었다 아이가. 그런데 이번에 겪어 보니까 알겠더라고. 그 사람들이 누구편인지. 있는 놈들 하고 짜고... 나라가 어째 이럴 수가 있노 말이다. 그동안 우리가 바보였는기라. 바보. 무식한 촌 노인들이라고 이래 당하고만 살아 온기라...그라니까 투표 잘 하소. 박정희가 전원특별법 만들어서 이때까지 이라고 있다 아이가. 사람도 많이 죽였다 카드만. 무섭다 무서워.”

그들은 70년 80년을 살아온 평생 동안 몰랐던 일들을 한꺼번에 알아차리고 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번만 찍어온 노인들이 정치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생존권과 재산권을 지키는 일을 통해 세상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나아가고 있었다.

“싸우면서 참 서러운 일도 많았는데, 자기 일도 아닌데 자기 일처럼 이래 달려와 주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그거 보면서 우리도 이 거 이기고 나면 온데 만데 연대하러 댕길라 한다. 강정마을도 가고. 핵발전소가 없어야 이런 송전탑도 필요 없는 거니까 핵발전소 반대 투쟁도 열심히 할끼다”

 

희망의 씨앗을 보다

그들의 의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굳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아서 일까? 그들은 내가 본 어떤 청년보다 강렬한 눈빛으로 삶의 한 순간을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절대로 돈으로 타협하지는 않을 기다. 우 리야 이제 죽어도 그만이지만 남아서 살아야 할 젊은 사람들한테 이렇게 사람이 살지도 못할 땅을 물려줘서야 되겄나. 그거 지키다 죽어도 우짤 수 없는 기라.”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컥 눈물이 났다. 그들의 단호한 투쟁에 대한 경외감이기도 하고 미안함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나를 눈물 나게 한 것은 그들 존재 자체다. 70년 80년을 산 사람들이 생에 가장 치열한 순간을 맞아 삶을 통째로 통찰하고 있는 모습. 온몸 세포 구석구석에 새겨진 경험적 습관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사실과 가치에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 그 세월 동안 만들어진 의식의 습관을 변화시키고 몸으로 살아내는 모습. 그것이 내게 희망의 씨앗이 되었다. 작년 희망 버스 때 어버이를 자처하는 노인들을 보면서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늙어 간다는 것은 ‘변화 가능한 시간’이 줄어 가는 것이고, ‘변화 가능한 의식의 여백’을 잃어 간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래서 중년으로 가는 길목에서 슬펐다. 얼마나 희망 없는 세대인가. 노년이라는 것은. 그러나, 밀양 산자락 송전탑 반대 농성장에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변화하는 존재이며, 그래서 세상은 변화가능하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했다. 슬픈 중년의 어느 날 나는 그렇게 노년의 푸르름을 만나 희망의 씨앗을 가슴에 심었다. 이것이 또 청년들에게도 어떤 씨앗이 되면 좋겠다. 낡고 굳어버린 세상의 생각들과 싸워 새로운 변화를 이끄는 세대가 아닌가. 세대 자체가 새로움이지 않은가. 그러니, 생각의 껍질을 부드럽게 하여 늘 새로움에 민감하고 변화에 대한 꿈을 놓지 않길 바란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변해도 너-무 변해야 하는 슬픈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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