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국통의 엄마!
[안녕하세요 교수님!] 국통의 엄마!
  • 이동건 기자
  • 승인 2013.09.03 17: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제통상학과 차경자 교수님

이번 291호 2학기 개강호와 함께 시작하는 안녕하세요. 교수님!
코너는 학우들의 가까이에 있지만 멀게 느껴지는 그분.
교수님께서 살아오신 삶에 대해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국통의 엄마!
국제통상학과 차경자 교수님

■ 부산출생
■ 부경대 무역학과 학사, 부산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사, 중국 대외경제무역대학 법학원 박사
■ 현재 종합인력개발원 부원장, 여대생커리어개발센터장, 해양대언론사 주간교수

 

Q. 안녕하세요. 교수님! 교수님은 무슨 이유로 부경대에서 무역학을 전공 하시게 되었나요?
부산에서 나고 자랐고 장녀였기 때문에 부산에 있는 국립대 중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해야만 했다, 막연하게 외국과 관련된 쪽으로 취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상경계열 중 당시 해양 혹은 수산 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유일한 학과라는 이유로 무역학을 택했다.


Q. 대학 생활은 어떠셨나요?
내가 입학한 88년도에는 거의 매일 시위, 집회가 있었다. 당시 학교의 교수님들도 시위 참여에 대해 반대하지 않을 정도로 사회가 어지러웠다. 많은 대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고 나 또한 사회과학동아리에 들어간 후 수업을 듣는 시간 보다는 대자보와 현수막을 쓰고 친구들과 토론하는 시간이 더 많았었다. 당연히 학점은 엉망이었지만 학생회 간부였기에 장학금을 조금이나마 받을 수 있었다.


Q. 그럼 공부는 언제 하셨나요?
90년이 되자 사회는 급속히 안정됐지만 대학생들의 분위기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
나 또한 여태까지의 활동에 회의를 느껴 6개월간 휴학 했고 그동안 공부에 너무 소홀 했다고 느꼈다. 복학 후 전공수업에서는 사회적으로 한창 화제였던 무역개방(우루과이라운드, FTA)에 대해 배웠기에 시위에 참여하며 배웠던 사회사상보다 너무 와 닿고 재미있었다. 수업을 많이 빠져 이수해야 할 학점은 많았지만 재미있었기에 어려움 없이 남들보다 1년 반 늦은 93년 8월 코스모스 졸업을 한 후 시험을 쳐 부경대 대학원에 합격했다.


Q. 그런데 왜 부경대 대학원에 들어가지 않으셨나요?
94년 대학원 합격 후 공부를 하기 전 꼭 외국에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원을 휴학하고 친구와 함께 가까운 동남아로 한 달 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나는 우리나라보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발달한 도시였던 싱가포르에 매료 됐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대학원 복학을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1995년부터 1998년 까지 싱가포르에서 살았다.

 

Q. 싱가포르에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당시 한국여성들이 많이 하던 관광 가이드가 너무 재미있어 보였다. 싱가포르에서는 정부교육을 이수하고 시험을 통과한 사람만 가이드를 할 수 있어 싱가포르 여행사에서 여행 코디네이터로 일하며 관광가이드 시험에 합격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Q. 왜 한국으로 돌아오셨나요? 그리고 귀국 후에는 무엇을 하셨나요?
97년 IMF사태 이후 한국관광객이 급격히 줄었다. 생활은 여유로웠지만 이 직업이 죽을 때까지 할 직업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98년 귀국 했다. 싱가포르로 가기 전 휴학했던 부경대 대학원에 복학하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 복학이 힘들었고 다시 공부하던 중 당시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했던 부산대 국제대학원에 매력을 느껴 지원 했다.


Q. 중국에는 어쩌다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중국에서 학위를 받은 교수님을 만나면서 전공연구로 중국을 연구하게 됐고 중국어도 배우게 시작했다. 당시에는 학원이 거의 없어 부산대 중어중문학과 수업을 청강하면서 조선족 출신 교수에게 부탁해 중국어 교습을 틈틈이 받았다. 이후 한국기업들의 중국투자 분쟁에 관심이 생겨 석사과정 여름방학 중 지도교수님께 중국 교수님을 추천 받아 이름과 전화번호만 들고 중국 교수님을 찾아갔다.
당시 석사 과정이 한 학기 남았었지만 교수님의 배려로 미리 시험을 치고 구 HSK(중국어 시험)7급이 되면 입학 할 수 있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는지 싶지만 한 달 만에 중국어 성적을 받았고 대학원 시험 또한 합격했다.


Q. 중국 유학 생활은 어땠나요?
대학원 생활은 아주 즐겁고 유익했다. 내가 부산대에서 만났던 미국 교수를 우연하게 중국 대학에서 만나 이 교수의 초청으로 박사과정 중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에 가보니 중국 공부를 계속 하는 것이 내 길이라고 느껴 바로 중국으로 돌아와 논문을 준비했다.

 

Q. 우리대학과는 언제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박사 취득 후 지도교수가 운영하던 중국 로펌에서 법률자문으로 1년간 일했고 2005년 말 부산대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게 돼 귀국 했다.
당시 중국 통상 전문가가 많이 없었기에 중국 관련 강의에 많이 나가게 되었고 우리대학에서도 시간강사로 강의를 하던 중 우리대학에서 중국통상 교수모집을 했다. 여기 지원을 해 국제통상학과 교수로서 2006년 2학기부터 함께하게 되었다.


Q. 특별히 기억나는 학생들과의 추억은?
07년 1학기부터 통상현장실무론(현재 통상실무론)수업을 했는데, 강의구성을 특이하게 했었다. 15주 동안 12곳의 기업 탐방을 다녔는데 당시로서는 신선한 강의였고 학생들의 입소문을 타 탐방 버스의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탐방 버스 안에서 학생들과 나눴던 대화들이 참 즐거웠지만 이후 학교 버스의 지원이 어려워지고 기업 탐방보다는 다른 방식의 수업이 필요하다고 느껴 2011년을 마지막으로 수업방식을 바꿨다.


Q. 교수님은 학생들과 많이 가깝게 지내신다는 의견이 많은 데 그 이유는?
처음 교수로 부임했을 때 다른 교수님의 “교수는 아는 것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이후 내가 학생이라면 이 과목에서 무엇을 듣고 싶을까? 라는 질문을 항상 되뇐다. 그래서 궁금한 점이 생기면 바로 카톡을 통해 학생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질문을 어려워하는 학생들도 있어 “교수님 사랑해요♥” 같은 닭살 멘트라도 적으라며 쪽지로 학생들의 의견을 받는다. 또한 명리학(사주)을 취미로 공부하고 있는데 학생들의 사주풀이를 많이 해줬다. 사주를 봐주면서 학생들과 대화하는 것이 상담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앞으로도 계속 공부할 생각이다.


Q. 강의이외에도 학교에서 여러 일을 맡고 계신데 이렇게 열정적으로 하실 수 있는 이유는?
최근 많은 직책을 맡아 학생들과 대화할 시간도 부족해지고 학회, 세미나에 참가할 시간도 줄어 힘들다. 하지만 대학의 일을 맡는 것도 학생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일이 재미없다면 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교수가 직업이라 행복하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의 행복은 잠시 이지만 항상 새로운 것을 습득하고 가르쳐야 하는 교수의 삶은 심심할 틈이 없어 축복 받았다고 생각한다.


Q.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은?
모든 학생들이 내 수업을 좋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서로 맞추어 나가기 위해서는 이해가 필요하다. 물론 교수 입장에서 학생들의 솔직한 의견을 듣는 것도 두렵기는 하지만 발전과 변화가 있는 수업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모두 즐거운 수업을 만들기 위해 학생들이 많이 도와주면 좋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