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학생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안녕하세요 교수님!] 학생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이며
  • 문대성 기자
  • 승인 2014.09.01 2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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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학부 송재욱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 코너는 교수님께서 항상 학우들 곁에 계시지만 어렵거나 잘 모르는 우리들을 위해 교수님이 어떻게 삶을 살아오신지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키 184cm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항해학부 송재욱 교수님

·경남 울산 출생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부(학사)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공학석사, 해사정보전산전공)
·나고야대학 대학원(공학박사, 정보공학)
·전 정양해운주식회사 항해사
·전 현대상선주식회사 항해사
·전 한국해양대학교 조교
·전 동남정보시스템주식회사 연구소장
·현 한국해양대 항해학부 교수

형식적인 한마디보단
학생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다는 사람
송재욱 교수님의 인생을 들여다보았다.
 

 노크 후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서자, 키 184cm 교수님의 중저음과 젊은 패션 감각에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기자가 건넨 "교수님, 패션이 정말 젊어 보이시네요"라는 첫 인사에 "젊지, 이제 내 나이 쉰인데"라며 웃으며 반겨주시는 송재욱 교수님과 함께한 2시간의 데이트를 시작해보자.

Q. 안녕하세요. 교수님! 교수님의 학창시절은 어땠나요?
"어릴 적 운동선수로 활동하고 친구들과 놀기 좋아해" 
울산에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지내다가 아버지의 일 때문에 서울로 전학가게 되었다. 울산에서 초등학교 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육상선수로 활동했다. 학교 대표로 전국체전 예선전도 나갔지만 운동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운동을 그만뒀다. 전학 간 서울에서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다. 기억 속에 고등학교 시절 음악 선생님의 숙제로 친구들과 세종문화회관에 공연을 보러갔었다. 지겨운 클래식 음악에 친구들과 공연장 뒤에서 어슬렁거리다 타 고등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이 붙었다. 고요한 클래식 공연을 듣다 10대 10으로 싸우고 집으로 돌아간 기억이 난다. 다행히 모두 크게 다치지 않았다.

"해양대 차석 졸업, 처음 듣는 해운회사 취직해"
88년 졸업 당시 해양대는 성적순으로 원하는 해운회사에 취직이 가능했다. 취직 방법은 1지망부터 5지망까지 원하는 기업을 적어 대학에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차석이었던 교수님은 그 당시 최고 인기 있던 호남탱커에 취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1지망부터 5지망까지 호남탱커만 적어 제출했다. 하지만 변수가 있었다. 군대를 다녀 온 선배가 취직을 할 경우 회사선택우선권이 군필자 선배에게 있었다. 88년도 호남탱커의 항해사 모집인원은 1명이었다. 2지망이 없던 교수님은 꼴등까지 모두 회사가 정해진 후 남은 회사 한자리에 이름이 적혔다. 차석을 하고도 처음 들어본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 교수님은 "그 시절 클레임 제도 같은 건 생각도 못했다"며 "회사이름이 정양해운이라는 것을 보고 다방이름인 줄 알았다"며 추억의 웃음을 지으셨다.  

"누나, 사실 내 나이는... "
대학교 2학년 때 남포동 식당에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그 당시 아내는 한 살 많은 연상이었다. 아내는 내가 제복을 입은 탓에 2학년인 것을 알아봤다. 그런 아내보다 나이가 많다고 속이기 위해 삼수했다는 거짓말로 연애는 시작되었다. 2년 뒤, 4학년이 되어 아내에게 동갑이라 속이고 결혼준비를 했다. 하지만 처갓집에서는 학생신분과 결혼 사주를 본 결과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를 했었다. 그래서 사주가 잘 못 나온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진짜 나이를 고백했다. 진짜 나이가 아내보다 한 살 어리다고 고백한 후 사주를 보니 좋은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호적상으로는 2년 늦게 생년월일이 등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함께 간 아내가 호적을 본 뒤 가관이라며 고개를 저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항해사에서 자동차영업사원 그리고 교수까지"
80년 후반부터 90년 초반은 항해사 임금과 육상임금의 격차가 가장 낮은 시기이다. 그때 아내는 항해사를 그만두고 육상직업으로 이직을 권했다. 그리고 몇 군데 육상직 해운회사를 알아보았지만 취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히 신문을 보다 자동차영업사원에 지원하고  취직이 되었다. 6개월 정도 자동차영업사원을 하며 대학시절 교수님께 차를 팔기 위해 해양대를 들렀다. 교수님과의 대화는 이랬다. "교수님 차 좀 바꾸시죠?"라는 질문에 "니가 직업을 바꾸는 것은 어떻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에 "무슨 직업을요?"라 묻자 "공부를 다시 해 볼 생각이 없니?"라고 답하셨다. 하지만 "이미 결혼 후 아이까지 있어 돈을 벌어야 되기 때문에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 때 교수님은 돈을 벌면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조교를 하라고 권유하셨다. 그리고 교수님의 말에 따라 조교를 하며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지금의 교수까지 올 수 있었다. 그 당시 교수님이었던 김환수 교수님을 떠올리며 "정말 깊은 인연인데 98년도 대만 출장 중 뇌출혈로 돌아가셔서 너무 안타깝다"며 말을 멈췄다.

"나고야 대학의 소방관, 송상"
일본의 문부성 장학생에 선발되어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받으며 나고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나고야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5층 연구실에 학생들이 커피를 타 먹을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건물은 검은 연기로 뒤덮은 상태였고 사람들은 건물 밖으로 뛰어나가기 바빴다. 뛰어나가려는 순간 눈에 소화기가 보였다. 미세하게 화재의 불씨도 보였다. 항해사 시절 소화기 다루는 교육덕분에 소화기를 다루는데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검은 연기를 헤치고 불씨로 다가가 화재를 진압했다. 그 당시를 회상하며 교수님은 "내가 왜 안 뛰어나갔는지 모르겠다"며 "배를 탈 때 소화기 훈련 해 둔 것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 후 소화기 사용법에 대한 강의요청도 받을 만큼 대학 내 소문이 퍼졌다.

Q.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술자리에서는 이야기를 하지만 평상시에 말 하는 것은 형식적인 이야기 같아서 싫다. 내가 젊어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지금 세대의 학생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고민이다. 충고나 조언은 같은 조건에서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만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나마 술자리에서는 서로 술기운에 학생들과 형 동생처럼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다. 그래도 학생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인식을 갖고 스스로 책을 사서 읽고 공부해야 한다.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하다고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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