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창 ‘해항도시’
세계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창 ‘해항도시’
  • 배수혁 기자
  • 승인 2014.11.20 2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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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화교섭으로 본 임진왜란

세계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창 ‘해항도시’

1. 해항도시와 초국적 네트워크
2. 문화교섭으로 본 임진왜란
3. 해항도시 마카오와 상해의 문화교섭

“역사 속에서 인간 집단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이질적 집단과 접촉⋅충돌⋅갈등⋅융합해 왔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들이 지속적으로 접촉하여 서로 사이의 문화요소가 전파되고, 새로운 문화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문화교섭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교섭을 통해 문화변동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혼종의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그런데 문화교섭은 동등한 상호 교류를 통해 일어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강한 문화가 약한 문화를 침탈하고 지배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임진왜란을 문화교섭의 시각에서 보면 16세기 동아시아의 문화교섭의 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최대의 국제전쟁으로 조일 상호 국가에 많은 피해를 주었던 임진왜란은 한편으로 수많은 문화접속 속에서 문화교섭이 지속된 시기였다.”
 - 문화교섭으로 본 임진왜란 中

조선에서 일본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전쟁 초기부터 전투부대와는 별도로 6개의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조선의 문물을 조직적으로 약탈하도록 하였다.

▲ 임진왜란 시기의 일본군 특수부대와 임무

 이처럼 문화약탈을 정부가 조직적으로 진행시켰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은 ‘문화약탈전쟁’이라 평가된다. 일본은 조선에서 약탈한 자원을 바탕으로 조선의 문화를 대량으로 흡수하였으며, 전쟁 이후 에도시대의 문화 발전에 전기를 마련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성리학

 조선의 성리학은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양반들이 일본으로 잡혀가 일본 곳곳에 보급되었다. 에도시대 이전까지 일본 사상계의 주류는 불교였으며, 유학은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승되었을 뿐 학문 수준과 영향력이 미약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국내외적으로 평화적인 질서를 정착시키려는 목적으로 주자학의 사상체계가 적합하다는 인식 하에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교류는 조선 후기에 조일 문화교섭의 선구적인 사례라 평가된다.
 
금속활자, 서적을 통한 인쇄문화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제조 기술은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기술보다 218년 앞선 고려시대에 최초로 발명되었으며, 조선 전기에는 더욱 발전했다. 세종대의 갑인자는 일본에도 널리 알려져 고라이도닌(高麗銅印)이라 불렸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 때 금속활자도 우선적인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약탈되어 현재 일본에 전해지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 활자는 대략 9만여 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승려들을 종군승으로 보내 조선의 서적과 한의술을 배워오게 하였다. 이들은 약탈한 서적의 가치를 식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전쟁 후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약탈한 서적을 정리하여 체계적으로 보관했다. 임진왜란이 종전된 후 조선통신사는 “일본에서 인출되는 책판은 흔히 우리나라의 서적을 가져다 되풀이 간행하고 있는 것인데 거의가 임진년에 침입하여 약탈한 것으로 서점에 약탈해간 책들로 가득 찬 곳이 많다”라고 증언했다.
 에도시대 260년간 조선과 일본 사이의 평화에는 주자학이라는 공통적인 이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임진왜란은 문화교섭을 통해 조일의 우호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된다.

도자기 기술의 전파

 임진왜란을 통한 일본으로의 기술 전수는 도자기 기술을 빼놓을 수 없다. 도자기는 가장 많은 문화전파의 효과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다도에 조예가 깊었던 일본 장수들은 전쟁 중에 앞을 다투어 도자기를 약탈하였을 뿐 아니라 도공을 납치하고 심지어 흙과 유약까지도 가져갔다.
 일본 아리타(有田)지방에는 조선 도공 이삼평이 세운 ‘아리타도자기’를 비롯하여 ‘백파선(白婆仙)’이라는 조선 여인 도공을 중심으로 한 집단도 있었다. 일례로, 아리타 지역의 도자기는 1644년 한 해에 4만 5,000점을 네덜란드에 수출할 만큼 번창했다.
 이렇듯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 도공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에도시대에 일본은 세계 최고의 도자기 수출국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부의 일본 전래

▲ 두부를 제조하는 일본인. 조선식 멧돌을 돌리고 있다

 임진왜란 전 일본에 있던 두부는 당나라로부터 전래된 연 두부였다. 그 시기는 7세기로 백제의 유민들이 일본 열도로 대거 이주해 백제문화권을 형성하였던 시기이다. 해상왕 장보고가 완도를 중심으로 해상권을 장악하고, 당나라와 일본의 교역을 관장하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두부는 삼국시대에 이미 한반도, 중국,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음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에 전래된 조선의 두부는 이미 일본에 전파된 연두부가 아닌 딱딱한 촌두부 제조 기술이다. 일본군과 싸우던 경주성장 박호인을 포함한 조선인들은 일본에 붙잡혀가 지금의 도진마치에서 두부를 제조하는 방법을 전파했다.
 이처럼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두부는 일본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렸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맛있고 전통이 있는 두부로 고지 시의 당인두부를 꼽는다. 이 당인두부는 박호인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 시기 중국에도 기술을 전파할 만큼 두부 제조법이 발달된 나라였지만, 현재 우리나라에는 두부 만드는 방법이 몇 가지 남아있지 않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문화는 다른 문화권에서 일본을 경유하여 전파된 것이다.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파된 대표적인 문화에 조총, 천주교, 고추가 있다.

조총의 전래

 

   
   
▲ 일본의 조총(위)과 조선의 승자총통(아래)
                                                                                                       조총은 15세기 말 유럽에서 만들어졌는데, 16세기 아시아에 진출한 포르투갈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 이것이 1544년에는 일본 전역에 보급되어 일본군 보병의 주무기로 활용되었다. 
 조선은 고려 후기에 일본보다 2세기 앞서 화약을 개발했지만 휴대용 화기인 ‘승자총통’을 개발하는 선에서 만족했다. 그러나 승자총통은 사거리가 30m에 불과하고 1분회 1회 발사가 가능한 수동식 점화 무기였다. 임진왜란 전 조선의 관료들은 조총을 과소평가하여 큰 대가를 치렀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총의 위력에 굴복했던 조선은 조총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항왜(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사람)중에서 무기를 제조하는 기술을 가진 자가 후대 받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도 조총을 대량 생산하게 되어 군사 편제와 전술의 변화가 일어났다. 무과에 조총 사격술을 포함시키고, 포수의 양성에 힘썼다. 또한 조선은 활에서 총과 검을 중심으로 전술의 변화를 이루었다. 이처럼 조선은 조총의 위력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이는 문화교섭에 뒤쳐질 경우 피해가 얼마나 커지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서 문화교섭의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의 전래

 임진왜란 중에 서양의 선교사가 일본의 종군신부로 조선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벌였다.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는 16세기 한국에 상륙한 최초의 서양인이자 임진왜란을 직접 목격하고, 그 소식을 4통의 서신으로 서양에 전한 유일한 증인이었다. 그는 조선에 1년 반에 걸쳐 체류하며 선교활동을 벌였다. 또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절망 속에서 천주교에 귀의한 사례가 많아 영세를 받은 자는 7,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고추의 전래 

 

오늘날 김치의 원료로서 붉은 색의 감미종 고추는 아메리카 원산지로 신대륙 발견 이후 임진왜란을 전후로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다. 고추의 유입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임진왜란 시기 중국과 일본 양 국가에서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는 1760년 이익, 이규경 등의 학자가 출간한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16세기까지 김치에 사용되지 않았던 고추는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 한국인의 식탁에 빼놓을 수 없는 식품이 되었다. 이에 고추를 사용한 김치가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후추를 밀어내었다. 특히 고추의 유입을 통한 김치 양념의 변화는 한국인의 식성을 바꾸었다고 평가된다.

도움 주신 분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김강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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