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문무겸비. 외유내강.
[안녕하세요 교수님!] 문무겸비. 외유내강.
  • 김태훈 기자
  • 승인 2014.12.11 16: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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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공학과 이중우 교수님

문무겸비. 외유내강.

건설공학과 이중우 교수님

 

 

경남 포항 출신

학사 한국해양대학교 1979 항해학

 

석사 한국해양대학교 1981 수송공학

석사 University of Hawaii 1987 해양공학,해안 및 항만공학

박사 University of Hawaii 1989 해양공학,해안 및 항만공학주요경력

한국해양대학교 항만운송공학과장/해양토목공학과장/건설환경공학부장

한국해양대학교 부설 항만연구소장/산업기술연구소장

한국해양대학교 교무부처장

교육부 NURI 사업 BUWICOM사업단장

교육부 BK21-2사업 WIS사업팀장

한국해양대학교 공과대학장

 

 

  평일 오후 생소한 전화를 받게 된 이중우 교수님. 학보사 기자에게 걸려온 인터뷰 요청 전화였다. “평소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나…” 라는 기자에 말에 교수님은 단 3분만에 흔쾌히 수락하셨다. 교수님 수업에서는 할 수 없던 진심어린 말들을 전할 장소를 찾던 것은 아니었을까? 기자가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이중우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 해사대학을 진학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향은 포항 구룡포이다. 반은 농촌이고 반은 어촌인 도시로 인구가 5만이 넘는다. 고향에는 우리대학를 졸업한 선배들이 많아 동경의 대상이 되곤 했다. 고등학생 때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에 있는 대학들과 우리대학에 원서를 접수했다. 가장 빨리 해양대에서 합격서가 날아왔고 가족들에 권유로 우리대학을 진학하게 되었다. 그 당시를 설명하던 이 교수는 “형제가 4남 1녀로 많아 한 사람 정도는 바다에 나가도 된다”며 농담을 던졌다.

 

Q. 어떻게 대외적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시게 되셨나요?

"아무도 건드리지 않던 항만을 공부하기 시작해“

  1979년도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실습선에 교관으로 2년을 보냈다. 교관생활과 함께 2년 동안 수송과학분야에서 석사과정을 밟았고 나아가 전임강좌로 수업을 처음 시작하였다. 당시 아무도 건드리지 않던 항만분야를 공부해 4학년 학생을 상대로 ‘항만 관리’ 수업을 했었다. 항만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분야로 지식이 넓어져 갔고 대외적인 인터뷰와 문의를 답해주면서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또한 누리사업단과 BK사업 단장을 역임하다 보니 그 업계에서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한쪽 책장에 놓여 있는 파력 모형 장치들은 교수님이 특허를 받은 것들이다. 한 분야에 누구나 알아주는 전문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Q. 어떻게 미국 하와이로 유학을 떠나시게 되셨나요?

“상선을 타던 중 합격 통지가 날아와”

  2년 동안 교관으로 지내는 동안 지도해주시던 정세모 교수님께서 영어권으로 유학을 권유하셨다. 당시 로타리 재단에서 장학금을 신청하기 위해 미국 5개 대학에 입학신청을 보냈다. 미국 지역에 전산정보공학과와 해양공학과 2군데에서 합격 통지가 왔는데 고민 끝에 해양공학과를 선택했다. 로타리 재단에서 장학금 합격이 날아오기 전 돈을 벌기 위해 1년간 상선에 올랐다. 3개월 정도 배를 타던 도중 합격편지가 날아왔고 로타리 재단에 1년을 기다려 줄 수 있냐는 답신을 보냈다. 다행히 상선에서 내리고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상선을 내린 뒤 미국을 찾아갔을 때 로타리 재단원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이 학생을 데려오기 위해 1년을 기다렸다’며 기분 좋은 말씀을 들었다. 하와이에서 2년 만에 석사, 2년 만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할 수 있었다.

 

Q. 항해학과를 졸업하시고 어떻게 건설공학과 교수님이 되셨나요?

“학교에서 연구실만 7번 옮겨…”

  하와이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당시 해양공학과와 항만운송공학과가 처음 신설되었다. 두 학과에서 각각 지도해주시던 원로 교수님들이 자신이 속한 학과로 와서 일해주시길 원했다. 고민 끝에 항만운송공학과에서 정식적인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계획에 따라 물류를 전공한 김태곤 교수와 토목을 전공한 김도삼 교수 등 한 사람 한 사람 교수들을 채용해 나가기 시작했다. 교수들을 점점 늘어 8명이 되었을 때, 총장이 항만운송공학과를 2개의 학과로 분과하도록 지시했다. 또 다시 선택의 기로에서 물류시스템공학보다 해양토목공학과를 선택했다. 이후 토질, 구조, 콩크리트 전공 교수들을 채용해 건설환경공학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작년 건설과 환경이 나누어지면서 현재 건설공학과의 교수가 되었다. 한마디로 학내에서 7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Q. 교수님은 만능 스포츠맨?

‘조정 4인 나이 합 200세 이상 프로그램 나가기 위해 몸을 만드는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운동이 부족하다고 느껴 대학에 들어오면서 태권도 동아리에 들어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보름동안 진행되는 내무훈련에서 ‘우리대학의 교기는 조정’이라며 학생들을 선별해 조정선수를 발탁됐다. 조정선수로 발탁되면서 훈련에서 제외되고 훈련을 하고 밥을 먹을 때 반찬을 더 주는 등에 혜택이 있었다. 2개의 동아리 활동은 동시에 불가능해 태권도 동아리를 나오면서 많은 고생을 겪었다. 4년 동안 조정선수로 활동하면서 10개가 넘는 매달을 가질 수 있었고 지금은 부산조정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현재 교수님은 일본 큐슈 조정협회와 교류전에서 참가자 4명에 나이가 200세 이상인 경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운동중이다. 덧붙여 이 교수는 “조정을 통해 공부를 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며 “조정을 배우지 않았다면 공부를 지금처럼 많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또한 우리대학 조정동아리를 위해 돈을 모금해 최근 4000만원을 상회하는 배 2척을 기증했다. 이어 8인용 에이트라는 배를 기증하기 위한 모임을 준비 중에 있다.

 

Q. 이 자리를 통해 학생들에게 해주시고 싶으신 말씀은 무엇인가요?

‘T자형 인간이 되라’

  학생들에게 항상 해주고 싶던 말은 ‘T자형 인간이 되라’ 이다. 오래 교직에 머무르면서 많은 학생들을 만나왔는데 대부분에 학생들은 다양한 분야를 배워보지도 못하고, 잠재력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T자형 인간이란 T의 머리 ‘ㅡ’처럼 관심 있는 분야들을 다양하게 배워나가고 T의 몸통 ‘ㅣ’처럼 한 분야만큼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도록 파고드는 사람을 말한다. 이 교수는 “어학공부와 학과공부 뿐만이 아닌 배워보고 싶은 모든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대학에서 가졌으면”하는 바람을 전했다.

 

Q. 교수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은 누구인가요?

‘모든 학생들은 각자 잘하는 일이 있다’

  교직 생활동안 얌전하고 말 잘 듣던 학생은 잘 찾아오지 않는다. 사고치고 엉뚱하던 친구들이 교수님이 생각난다며 찾아오곤 한다. 매번 스승의 날 빠지지 않고 찾아오는 제자가 있는데 일이 없더라고 가끔씩 연락이 오곤 한다. 그 제자는 편입해 들어와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친구인데 성적이 좋지가 않았다.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던 그 제자는 지금 김밥집을 차리고 승승장구하며 잘 살고 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시작한 분식사업이 크게 잘 풀린 것이다. 그 제자를 보고 있으면 모든 학생들에게는 각 분야에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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