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스쳐 지나가는 인연도 놓치지 마라
[안녕하세요 교수님!] 스쳐 지나가는 인연도 놓치지 마라
  • 박규태 기자
  • 승인 2015.02.26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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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수송과학부 박영수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 코너는 학우들의 가까이에 계시지만 학우들이 너무도 모르는 교수님들께서 살아오신 삶에 대해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해사수송과학부 박영수 교수

-경남 부산 출생
-한국해양대학교 해사수송과학부 공학사
-한국해양대학교대학원 해사산업공학 공학석사
-전 Japan Marine Science(NYK그룹) 연구원
-전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대학 조교
-현 한국해양대 해사수송과학부 교수
-현 한국항해항만학회 연구이사·해양환경안전학회 상임이사
-현 한국수산해양교육학회 이사
-현 행정안전부 행정사 자격심의위원회 위원
-현 (주)한국해양개발 자문위원

 

안녕하세요 교수님!의 주인공을 찾던 기자는
해사수송과학부 학생들의 추천으로 박영수 교수님을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혹시 ○○○, ○○○ 학생들을 아시나요?
“아~ 그 잠 안자는 학생들? 매일 책 들고 찾아 오더라”며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인연이 될지 몰라! 그래서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억하지”라며 유쾌하게 반겨주시는 박영수 교수를 만나보았다.

 

 
Q.안녕하세요. 교수님! 교수님의 학창시절은 어땠나요?
“운동을 무척 좋아하다보니 지금도 축구를 해”
_    초등학교 시절 주변에 온통 미나리 밭이었는데 학교가 이 밭들을 메꾼 후 공터와 야구장으로 만들었다. 그 덕에 다양한 운동을 할 수 있어 매일 친구들과 학교에서 야구와 축구를 했다. 한 번은 공이 운동장 밖으로 날아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공이 지나가던 사람의 얼굴에 맞아서 안경이 부러졌다. 그 당시를 생각하며 박영수 교수는 “안경이 부러진 행인이 학교로 찾아와 크게 혼난 기억이 있다”며 웃었다. 그만큼 운동을 좋아하던 박영수 교수는 지금도 조기축구회에 나가 학생들과 축구 내기를 하곤 한다.

"해사대학생 시절 잊을 수가 없어"
    해사대학은 입학 전에 적응 훈련을 한다. 박영수 교수는 적응 훈련 때 항상 밥이 부족해서 아쉬워했다. 해사대학 규율에 따른 식사 시간이 제한돼 밥을 마음껏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응 훈련이 끝난 후 박영수 교수는 “밥이 너무 먹고 싶어 집에 오자마자 냄비 한 솥 채 먹었다”고 말했다.


    입학 후 3학년이 되어 인원 확인을 맡는 조장을 했다. 훈련 후 쉬는 시간이 끝나고 집합하는데 학생 2명이 사라졌다. 행방불명된 학생들을 찾았는데 방에서 자고 있었다. 이 2명의 학생들은 1학년 때부터 사고를 많이 쳐 오십보백보라는 별명이 있었다. 박영수 교수는 “세월이 지나 이 오십보백보 중 한명은 외국계 회사 다니고 있고 다른 한명은 선장을 하고 있다”며 웃으며 말했다. 박 교수는 대학시절 뛰어난 필기 능력으로 동기들에게 필기의 인기가 많았다. 노트를 공유하다 4학년 때 너무 공부를 안 하는 동기들 때문에 노트를 숨긴 적 있다. 그런데 박영수 교수는 “강의실을 가보니 익숙한 복사본이 돌아다녔는데 자세히 보니 내 필기였다”며 “어떤 친구가 몰래 노트를 훔쳐다 복사했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후 사건당사자는 그 노트 덕분에 졸업 할 수 있었다고 감사를 전했다.

“마음 아팠던 일본 방문기”
    박사를 졸업하고 일본 NYK 그룹 연구직으로 취직했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 한국과는 다른 분위기 때문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박 교수는 “일하러 가면 회사 사람들은 항상 휴대전화기를 꺼놨었다”며 “개인생활이나 사적인 통화는 전혀 없고 중요한 전화가 아니면 절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일만하는 분위기 속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곤 했다. 그 당시를 회상하며 “하루 종일 컴퓨터로 작업만 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지쳤다”고 말했다. 공부하러 갈 땐 항상 자전거를 이용했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와 도로교통이 다르다는 것을 잊은 채 자전거를 타다 차와 부딛친 적도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 제가 왔습니다”
    지쳐가는 일본생활에 마음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일본 고베 지진 이후 생긴 다중 언어 방송국이 있다.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하나노카이‘라는 경로당을 알게 되었다. 재일동포 할머니들이 머물고 있는 경로당이다. 이후로 시간이 될 때 마다 할머니들을 위해 봉사를 가곤했다. 하나노카이를 가면 할머니들이 반겨줬고 전기장판을 선물 받은 적도 있다. 가끔 할머니들과 대화 하다 보면 한국어가 일본어와 섞여있어 곤란했었다. 박영수 교수는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나물을 무치다’ 라고 하는데 재일동포 할머니들은 무치다에 스루(하다)를 합쳐 ‘무치스루(하다)’라 한다”며 웃으며 말했다. 박 교수에게 하나노카이로 가는 봉사는 지친 일본생활에 활력소였다. 이후 귀국한 후 지난해에 처음으로 일본 출장을 갔었다. 할머니들을 뵙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가지 못한게 아쉬웠다. 하지만 최근에 일본에 사는 친구의 페이스북 덕분에 할머니들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만약 할머니들을 만난다면 “할머니 제가 왔습니다”라고 따뜻한 한마디를 전하고 싶다.

“나는 아직 젊은데..”
     교수가 되니까 주변 지인이 주례를 서달라고 한다. 마흔 셋에 주례라니! 조금 걱정했다. 왜냐하면 마흔 셋은 아직 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인에게 주례를 설 자격이 있는지 상담 했는데 “너무 이르지 않나”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자꾸 반복되는 부탁에 결국 수락했다. 아내에게 주례를 읽어주니 아내는 “우리 결혼생활도 주례내용처럼 해달라”며 웃었다. 박영수 교수는 “주례 때문에 가정생활을 잘하고 있는지에 대해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고 말했다.

Q.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공부 하다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논문 저자 옆에는 항상 사진이 있다. 일본에 실습 조교로 갔을 때 지인의 소개로 그 저자를 만나게 되었다. 덕분에 박사 과정을 공부하며 그 사람의 도움을 얻은 적이 있다. 이 인연을 시작으로 현재도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이 후로 모든 인연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학생들도 너무 학업에만 얽매이지 말고 주변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살면서 만나는 소중한 인연들을 이어가길 바라고 인연의 소중함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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