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젊고 뜨거운 피를 가진 열정파
[안녕하세요 교수님!] 젊고 뜨거운 피를 가진 열정파
  • 김효진 기자
  • 승인 2015.06.09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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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체육학과 조우정 교수님

 

젠틀한 모습으로 초콜릿과 차를 내주시던 조우정 교수님.
열정으로 가득한 젠틀맨, 조우정 교수님을 만나보자!

 

▲ 조우정 교수님

 

 

Q. 안녕하세요. 교수님!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촌에서 양궁을 품은 아이, 어린나이에 실패를 맛보다”

_고향은 광양으로 그때만 해도 어업을 주로 하던 곳이었다.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친구들끼리 바다에서 놀곤 했다. 아마 어렸을 때 뛰놀던 바다가 인연이 되어 해양대까지 오게 된 것 같다. 그때는 재미라기보다 눈앞에 바다가 있었기에 놀이터의 전부가 바다였다. 그러던 중 선배들이 활을 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렇게 멋있어 보일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성미가 풀려 부모님을 졸랐고 고등학교 때까지 양궁선수 생활을 했다. 넉넉한 형편이 아님에도 지원해주신 부모님께는 감사했지만 양궁으로 대학을 가려니 신체조건과 대회성적이 발목을 잡았다. 양궁 특기자로 대학에 가려면 전국대회에서 3위 이상의 메달을 따야했는데 고등학교 3년이 지나고 남은 건 메달 하나였다. 우리나라가 양궁 세계 1등이다 보니 체격도 좋고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스스로는 메달 하나가 값졌지만 하나 가지고는 인정받고 대학에 가기가 어려웠다. 기회를 살리지 못하니 그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3학년 2학기 때 양궁을 포기하게 되었고 열심히 했지만 어린나이에 실패를 맛보게 되었다.

 

 

“다시 잡은 연필, 공부하는 방법에는 무식한편”

_이미 한 번 겪은 실패로 다시 운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시 연필을 잡고 대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계속 해온 공부를 고등학교 3학년 2학기가 되서야 시작하게 되었다. 공부를 영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어려움이 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 공부가 막 싫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특히 영어공부가 어려웠지만 재밌었다. 공부하는 전략에 있어서는 무식한 편이라 혼자서 공부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제일 어려운 영어책을 항상 끼고 고시생들이 2만2천 단어장을 외우면 3만3천 단어를 공부했다. 새벽 6시에 나가서 하루 종일 영어공부만 했다. 그제서야 스스로 영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어떤 분야에 만 시간을 투자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만 시간까진 안 되더라도 오천 시간만을 투자해도 영어에 눈을 뜰 수 있다 얘기해주고 싶다.

 

 

“중국친구 같은 얼굴 덕 좀 봤죠”

_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당시에는 꿈이 없었다. 왜 공부해야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피난처처럼 군대를 다녀왔다. 당시가 96년도로 IMF 사태를 맞이하기 전이었는데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하면서 대학생 사이에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것이 유행이었다. 거의 모든 대학 캠퍼스에 어학연수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그 현수막을 우연찮게 보고 친구와 ‘뉴욕에 한번 가자!’한 것이 진짜로 뉴욕 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가서는 영어공부를 하기보다 사람 사는 구경을 하거나 스피킹에 집중했다. 그런데 내 얼굴이 한국인 보다는 남방계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앉아있으면 중국 친구들이 와서 ‘알 유 차이니즈?’하고 묻는 일이 많았다. 처음엔 한국인이 중국인으로 오해받는 것이 너무 싫었지만 그 덕에 중국친구들과 친해졌고 스피킹이 많이 늘었다. 나는 중국친구들에게 부족한 문법을 알려주고 2년 동안 미국에 지낸 중국친구는 나의 스피킹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중국인 같은 외모가 싫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비슷하게 생긴 친구들 덕분에 스피킹 실력이 발전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대만, 중국 친구들을 보면 더 챙겨주고 싶고 그렇다.

 

 

“스포츠 마케팅을 품고 뉴멕시코로!”

_어학연수로 외국인 친구들과 지내면서 많은 자신감을 얻었고 다시 한국에 와서도 미국유학길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IMF로 세상이 바뀌어 있었고 농사와 양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부모님의 가정경제도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동생들까지 있어 쉽지 않으셨을 텐데 부모님께서는 “그럼 갔다 와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 감사함이 지금까지 온 원동력이 된 것 같다. 그렇게 유학을 결정하고 무작정 떠나기 보다는 유학을 준비하는 기간을 가졌다. 국민들이 IMF로 실의에 빠져있을 때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준 것이 박세리, 박찬호와 같은 운동선수들의 활약이었다. 그 운동선수들을 기업의 마케팅에 활용해서 기업을 살리는 스포츠 마케팅 붐이 일어났고 그런 붐을 타고 스포츠 마케팅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뉴멕시코로 행선지를 정한 것은 아니었다. 왜 뉴멕시코에 가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사실 유학을 준비하면서 결혼을 했다. 아내도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영양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의 전공이 같이 있는 대학이 많지 않았고 최종적으로 둘 다 승인이 온 곳이 뉴멕시코 대학이었다. 하지만 유학길에 오를 때의 자신감과 다르게 첫 리포트에서 좌절감을 느꼈다. 리포트를 검사한 선생의 첫 코멘트가 ‘영어 공부 좀 더 하셔야겠다’였다.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생각할 정도로 막막했지만 지도교수님이 유학을 준비하며 읽게 하신 책이 생각났다.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이었는데 남들보다 더 뛰어나기 위해서는 두 세배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외국친구들보다 두배, 세배 이상 노력했고 박사학위 시험에서는 좋은 성적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뉴멕시코 대학으로 간 것은 행운 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_우리 한국의 대학 교수님들은 너무 바쁘다. 학생들에게 시간을 투자 해야겠다 생각은 하지만 개인적인 여러 연구들로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이 너무 미안하다. 대학이 연구에 초점을 두고 교수들을 평가하다보니 교수들도 연구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다. 연구중심, 상업중심, 사업중심인 대학의 시스템을 바꾸기도 쉽지 않다. 연구 쪽에서는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데 학생들에게는 시간을 더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대학생활 하는 동안 실패를 해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름 경쟁력 있는 친구들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 보면 안타깝다. 큰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움츠리는 단계가 필요하다. 그 시간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움츠리고 있는 단계에서 진짜 실패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사소한 것을 등한시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조그마한 것에서 얻는 성취감이 큰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자신감을 준다고 말하고 싶다.



 


김효진 기자
hj_wow_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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