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삶에 진중하자
[안녕하세요 교수님!] 삶에 진중하자
  • 김기섭 수습기자
  • 승인 2015.08.31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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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공학부 김길수 교수님

  바쁘신 와중에도 기자의 질문 하나하나에 끝까지 답해주셨던 책임감 넘치는

 교수님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Q. 안녕하세요. 교수님! 교수님의 지난시절 어땠나요?

 “하늘 밑 푸른바다가 가슴을 열고, 닫힐 뻔”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이 시 구절을 처음 접했을 때 바다에 대한, 그리고 배를 타는 것에 대한 낭 만을 품었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삼천포 바닷가에서 나고 자라 바다와 친숙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학창시절부터 줄곧 선장을 꿈꿨다. 선장을 양성하는 대학은 해양대가 유일했고 당시 입학성적이 높았던 해양대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대를 목표로 하고 공부했다. 결국 수험생활의 끝에서 나는 해양대 합격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흰 돛단배를 타고 푸른 바다를 누비는 낭만을 품고 입학했지만, 엄하고 혹 독한 생활에 금방 낭만을 접고 자퇴를 결심했었다. 당시 해사대학생들 이 받는 훈련은 내가 예상한 정도가 아니었다. 한 번은 주말에 외박하고 일요일에 귀교하기 전 헌혈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해사대학생들은 일요 일마다 특별훈련을 받았는데 나는 헌혈한 사정을 잘 얘기하면 훈련을 지휘하는 작전관이 이해해주고 훈련에서 제외시켜줄 줄 알았다. 그런데 사정만 듣고 훈련은 계속 받게 하더라. 피가 단지 몇 백 그램 없었을 뿐 이었지만 운동장을 뛰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리고 심하 게 어지러워서 정신을 잃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훈련 중 졸도 를 하였고 생활관까지 친구 등에 업혀 돌어와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여 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퇴서를 적어들고 지도관에게 갔었다. 하지만 나의 고향 삼천포에서 내가 선장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해 자퇴는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저희 형님이 여기서 뭘 하신다고요??” 

 수험생일 때 해양대학교 시험을 친 직후 서울대 시험에도 응시하기 위 해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신촌에 사는 둘째 형님 집에 하룻밤 신세 지 기로 하고 갔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형님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부 산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강남고속터미널로 가는데 예상치 못한 폭설 때 문에 너무 늦게 둘째 형님 집에 도착하였다. 서로 오랜만에 보는 형제를 반가워할 겨를도 없이 곧장 서울대에 수험표를 받으러 갔다. 그리고 나 서야 잊고 있었던 저녁을 먹으러 갈 수 있었다. 우리가 식당을 찾아 근처 명동 거리를 걷는데 갑자기 웬 구두닦이 몇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를 향해 인사를 했다. 사람을 잘못 봤나 싶어 그냥 지나갔지만 나중 에 형님 집으로 저녁에 봤던 구두닦이들이 찾아와 그 날 수입을 상납하 는 모습을 보고서야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상대로 우리 둘째 형 님은 명동 일대를 주름잡고 있던 조직폭력배의 대장이었다. 지금 생각 해보면 우리 집안도 나름 콩가루 집안인 것 같다. 첫째 형님은 목사, 둘 째 형님은 조폭, 셋째 형님은 여자 좀 많이 울리는 남자, 나는 대학교수. 그래도 집안 형제들 모두 제 갈 길을 간 것 같긴 하다.

 

“동생아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말고” 

 잠깐 학교를 자퇴할 생각도 한 적도 있었지만 어떻게 잘 넘겨 무사히 졸업을 하였고 선사에 취업을 하였다. 군대를 가지 않는 대신 2년 동안 상선을 타며 대체복무를 했는데 당시 3등 항해사에겐 매달 급여로서 월급과 작업수당이 지급됐다. 급여는 다달이 받는데 배 위에선 쓸 곳 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에 1년 후 잠시 하선했을 때 수중에는 그동안 모인 급여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급여 중 월급은 가난했던 고향 집 으로 모두 보냈고 나머지 작업수당은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했다. 그 런데 그런 고민 시작 전에 우선 배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하고 싶던 일을 하기로 했다. 바로 고향에 있던 여동생을 부산 남포동으로 초대 하는 것이었다. 이 동생에게는 뭐든지 해주고 싶은 게 당시 내 버킷리 스트였다. 여동생에 대해 잠시 얘기하면, 내가 해양대 합격 소식을 집 에 전한 날 내 어리고 여린 여동생이 저녁을 차리다 말고 눈물을 뚝 뚝 흘렸다고 한다. 물론 기뻐서 흘린 눈물이었겠지만, 그 동안의 무 척 가난하고 고된 생활을 힘든 티 안내고 씩씩하게 버텨던 여동생이 었기에 그 눈물의 의미는 좀 더 깊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얼 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대견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 래서 내가 배에서 내린 직후 동생과 제일먼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며칠 후 동생이 남포동으로 건너왔고 같이 거리를 누비며 제일 먹고 싶었던 불고기도 먹고 커피도 사 마시고 돈 쓸 줄 모르는 남매가 이 것저것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경영학을 전공한 해운 전문가로서”

대체복무로 2년동안 배를 타면서 집에 보낸 돈과 동생을 위해 쓰고 남은 돈으로 대학원에 갔다. 내가 4학년일 때부터 교수요원이었던 만큼 교수로서의 진로도 생각 중이었기에 한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영국에서 순수경제학 박사학위를 얻어 우리대학 항해학과의 교수로 부임했다. 실습경험을 바탕으로 해운분야에 경영과 경제를 접목시키니 해운경영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학자들보다 비교우위를 가졌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해운·항만에 제도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제공한 일이 빈번히 있었다. 그 아이디어 중 하나가 Trigger – System이다. 한때 부산항과 광양항이 컨테이너 항만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각자 자신들의 항만이 우선적으로 개발되어야 한다며 결론 없는 갈등을 계속 하던 적이 있었다. 나는 이러한 경쟁구도가 잘못되었다고 보고 어느 날 하나의 안건을 제안했다. 현재 각 항만에서 컨테이너 처리 가능한 전체 양의 60~70% 정도를 스스로 채웠을 때 국가에서 개발 할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이었다. 항만 간의 경쟁보다는 각 항만이 자발적으로 능력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제안이었기 때문에 당시 해양수산부 오거돈 장관이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국가정책으로 적극 수용하였다. 그때는 내가 공부한 것이 국가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에 매우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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