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인생의 쓴소리를 마다하지 말자
[안녕하세요 교수님!] 인생의 쓴소리를 마다하지 말자
  • 이창현 수습기자
  • 승인 2016.02.29 1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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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법학부 이용희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 코너는 교수님께서 항상 학우들 곁에 계시지만 어렵거나 잘 모르는 우리들을 위해 교수님이 어떻게 삶을 살아오신지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인생의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아빠 같은 교수!

해사법학부 이용희 교수님

경희대학교 법률학과 학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석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박사

전 한국해양연구원 책임연구원/정책연구실장

전 미국 하와이대학교 법과대학 객원연구원

전 국제해저기구 연차총회 정부대표(법률자문)

현 국가과학기술심의회 전문위원

현 해양수산부 미래기술위원회 위원

현 국립해양생물자원관 비상임이사

현 해양과학기술진흥원 전문위원

현 국제해양법 특별중재재판소

해양과학조사분야 중재전문가

비 오는 겨울날

따끈한 루이보스 차와 해맑은 미소로 반겨주시던 교수님

기자의 사진 부탁으로 주말도 학교에 나와주신 이용희 교수님을 만나보았다.

 

서막Ⅰ : 제 1의 전성기

‘학창시절’ “어릴 적 지내던 마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_고향은 충청북도 청주다. 당시 마을에는 또래 친구들이 별로 없어 어쩔 수 없이 친구들과 같이 놀지를 못했다. 그래서인지 집에서는 자연스럽게 책에 손이 갔다. 결국 국민학교 때부터 책을 많이 읽은 나는 동네에서 ‘문학소년’이라고 불렸다. 그 당시 국민학교 6년 중 5년을 문예부장을 맡아하면서 시나 독후감 대회의 상이랑 상은 모두 휩쓸었다. 또래 친구가 없어 쓸쓸하다고 느껴졌던 나의 마을이 나를 ‘책벌레 모범생’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또 대단한 달변가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웅변 반에 들어가면서 성격이 외향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용기를 얻게 되고, 그동안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면서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6학년 때는 전교 회장에 당선되었고 중학교 시절에는 3년 동안 반 실장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_꿈 역시 책을 통해서 얻었다. 국민학교 때 이솝우화 [어린 판사]를 읽고 나서부터는 ‘판사’라는 꿈이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꿈이 명확했기에 어느 대학을 목표로 가기보다는 전공을 먼저 결정했다. ‘무조건 법학과를 가겠다’고 생각하며 오직 ‘판사’라는 꿈을 향해 공부했다. 중·고등학교 당시 친구들이 싸우면 담임선생님한테 가지 않고 나에게 찾아와 시시비비를 가릴 만큼 ‘판사’라는 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게 법학과의 최고봉인 서울대를 들어가기 위해 학력고사를 준비했지만 수학 시험을 망치는 바람에 경희대학교에 특차로 입학하게 되었다.

“낭만 그게 뭐야?”

_대학을 입학할 당시는 1980년대였다. 바야흐로 국가의 큰 혼란기에 대학을 입학하면서 머릿속에는 ‘대학시절의 낭만’이란 단어는 지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법학과다 보니 여학우들도 별로 없고 선배들이 학생운동을 앞장서서 하는 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운동에 참여하며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 당시는 “뜨거운 피를 가진 젊은이들이라면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운동에 참여하다 보니 어느새 3학년이 되어버렸고 그때부터는 판사가 되기 위해 본격적으로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나오는 지옥 같은 고시생활. 그때는 이런 고시생활이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다. 이렇게 나의 대학생활은 ‘낭만’이란 단어 없이 물 흐르듯 흘러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_대학교 4학년 때까지 사법고시에 2번 떨어지고 어쩔 수 없이 대학원으로 진학해 3번째 고시 시험을 쳤을 때였다. 마지막 시험지를 제출하고 긴장이 풀린 나머지 기절해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시험장에는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혼자서 시험장을 걸어 나오는데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길로 집에 돌아가 “이번 시험에서 떨어지면 그만 두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결국 시험에 떨어지고 판사라는 꿈을 접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도 감정적인 이유로 꿈을 접었던 것 같다.

 

서막Ⅱ : 필연의 아치 섬

어쩌면 당연했던 운명, 한국해양대와의 인연

_고시공부를 접고나서 할 수 있는 건 다시 공부뿐이었다. 당시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하고 그중에서도 해양법에 관해 공부하고 있었다. 국제법을 전공한 이유도 역시 학창시절 세계사에 관심이 많아 관련된 책을 많이 읽었고 자연스레 국제법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그때 정말 멋지신 교수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국제법 지도교수였기 때문에 국제법을 전공했다. 만약 그 교수님이 다른 전공이었다면 아마 다른 전공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후 대학원 석·박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정부기관 소속의 한국해양연구원 정책실에서 근무하게 된다.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정부대표로 해양관련 국제회의에 참석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연구원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2004년 정부대표로 자메이카 출장을 가던 도중 외교부 일행이 “이 박사 한국해양대 해양법 교수 자리 남았다던데? 한번 지원해보지그래”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듣고 천천히 생각해보니 정부 소속기관에서 연구하기 때문에 정부가 필요로 하는 연구만을 하고 정작 내가 원하는 연구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자꾸만 나 자신이 고갈되고 학문을 시작한 본질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만약 교수가 된다면 하고 싶은 연구도 할 수 있고,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지식을 전달하는 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국제법과 해양법을 전공한 나에게 한국해양대는 또 다른 기회라 생각하고 바로 해사법학부 교수직에 지원하게 된다.

젊은 피와 같이 호흡하게 되다!

_연구원 생활만 하다가 학교에 오니 젊은 학생들과 부딪히고 섞여 살면서 나 자신이 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가끔 옛 친구들을 만나면 “젊은 친구들과 같이 생활하니까 더 젊어지는 것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지금은 젊은 친구들과 함께 의사소통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 때문에 학생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항상 수업을 시작하고 10분에서 15분 정도 그날의 이슈를 함께 토론해보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데 뜨거운 청춘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다보니 내 강의를 듣는 일부 학생들은 신문을 읽고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 대부분의 청춘은 도전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면서 바깥세상에 귀를 열지 않는다. 오락이나 하면서 무의미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학생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 안타깝다.

 

서막Ⅲ : 내 자식 같은 학생들에게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참으로 복된 시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_아마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많은 학생이 알고 있을 것이다. 뜬구름 잡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학생들이 대학 4년이란 시간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앞으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아직은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대학시절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한정돼있고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계획성 있게 살아야 한다. 학생들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나는 “거짓말하지 마!”라고 답한다. 열심히 하겠다는 것은 구체적인 계획은 없고 당위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무엇을 열심히 하겠다’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한다. 그 후 자신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를 해야 비로소 진보하고 발전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밖에 없다. 옆에 있는 친구도, 부모님도, 그 누구도 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나의 인생은 나만 바꿀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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