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 선배] 흔들리되 부러지지 말자
[기자가 만난 선배] 흔들리되 부러지지 말자
  • 윤종건 기자
  • 승인 2016.03.01 1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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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안전경비본부 수색구조과 경감 서상욱 동문 (해양경찰학과·98)

 

▲ 해양안전경비본부 수색구조과 경감 서상욱 동문 (해양경찰학과·98)

 
  이번 <기자가 만난 선배>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해양경비의 중심, 인천해양경비안전본부에 근무하는 서상욱 동문(해양경찰·98)이다. 힘든 대학시절에 품은 자신의 인생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뜻하지 않은 해양경찰과의 만남
  고등학교 시절 서동문은 법조계를 희망했다. 성적이 좋은 그였기에 서울에 소재한 법학계열 진학을 원했다. 하지만 그가 대학을 갈 당시 IMF외환위기로 아버지의 사업이 갑작스레 무너졌다. 집안경제가 파탄된 상황에서 재수한 형과 함께 대학에 보내야하는 부모님의 상황을 그는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홀로 대학진학을 고민하던 때에 서동문은 그의 아버지, 형과 함께 도란도란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해양경찰학과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법학계열도 아닌 해양경찰학과라는 말에 그는 놀랐다. 게다가 해양대는 부산에 살면서도 알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아들아, 내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보니 인생에서 2가지만 버리면 되더라. 하나는 ‘돈 욕심’이고 다른 하나는 ‘자존심’이다” 아버지가 어떤 의미로 그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는 알 수 있었다. 긴 시간 꿈꿔온 법조인의 꿈은 멀어졌지만 아버지의 말씀대로 해양대에 가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충성! 경위 서상욱!
  1학년 말에 ‘현대산학장학생’으로 선정된 서동문은 졸업 후 현대상선에 취직해 3년간 배를 탔다. 의무승선생활 후에도 현대상선에 남을 계획으로 승선 날짜를 잡아두고 서동문은 여행을 떠났다. 눈부신 남해 바다를 눈에 담으며 여행을 하는 도중 그는 문득 하늘을 우러러 봤다. 맑은 하늘! 그 순간 그는 젊은 청춘의 때를 승선생활에 헌신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뜻 모를 회의감에 사로잡힌 그는 어머니께 전화했다. “어머니, 배를 계속 타야할까요?” 그런 그의 말에 어머니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니? 우리 아들이 잘 선택해라”며 그를 응원했다. 어머니 말씀에 마음을 다잡은 그는 계획된 승선을 취소하고 회사에 사표를 냈다.
  회사를 나온 후 서동문은 서울길에 올랐다. 꿈을 잊지 못해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싶었으나, 승선생활 중 모아둔 돈도 부모님 전셋집을 구해드린 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사법고시의 꿈을 접고 해양경찰간부후보생 시험을 준비했다. 이듬해 시험에 합격해 경위로 임관한 그는 인천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남들은 모두 기피하는 현장근무를 그는 자발적으로 지원했다. 중국어선을 단속하고 그들에게 물리적 제재를 가하는 업무에 죽을 고비도 여럿 넘겼다. 대학시절부터 요트부활동이든 학과공부든 어떤 일을 하면 남들이 이상하다 할 정도로 열심히 하는 그였기에 대충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나의 계급은 경위일지라도 순경이라는 마음으로 일했다”며 “그것이 경찰조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양경찰의 블루오션, 경비과
  6개월간의 현장 근무를 마친 서동문에게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본청 경비과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것이었다. 경비과는 중국어선단속과 대북어로보고에 관한 정책수립이 주 업무였다. 주위에 물어보니 경비과 업무는 소위 ‘노가다’라며 모두들 말렸다. 주위의 만류에 그 또한 망설여졌다. 그러던 차에 경비과장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당시 과장은 “지금까지 남들은 모두 힘들다고 했지만 경비과는 해양경찰을 대표할 수 있는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며 같이 일할 것을 권했다. 서동문은 그 전화를 받고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이왕 일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경비과를 지원했다.
  2009년. 서동문이 경비과에 들어간 해이자, 남북상황이 악화일로(惡化一路)로 치닫는 해였다. 가고 보니 예상대로 일은 끝도 없이 쏟아졌다. 중국어선 사고 발생을 시작으로 연평도 사건, 천안함 사건 등 굵직굵직한 해상 안보업무가 줄을 이었다. 산적한 업무의 양은 많고 업무는 어렵다 보니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 그는 “당시엔 야근 정도가 아니라 사무실에서 먹고 자는 게 일상이었다”며 “업무를 시작하고 몇 개월간은 해양경찰이 된 것에 회의감을 느낄 정도로 힘들었다”고 설명했다.

  크게 보고 넓게 생각하기
  경비과에 있던 3년은 업무가 힘든 만큼 서동문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2009년 5월 우리나라는 PSI(대량살상무기 방지)에 가입했다. 국제적 협정인 만큼 관련 정책 수립에 국가 간 협조가 절실했다. 이를 위해 여러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업무의 전문성을 다질 수 있었다. 특히 대학시절과 승선생활 중 공부한 해사영어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항해사관들은 외항선을 타면서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아니까 많이 활용할 수 있었다”며 “안에서는 죽어라 일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개인적으로 만족감을 많이 느꼈다”고 전했다.
  이어 서동문은 “지금와서 보니 대학생활 중 다양한 경험들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대학생활 중 그는 바다를 단순히 ‘고립’의 공간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하니 자신의 융통성과 도전정신도 함께 고립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선택의 폭은 자신이 보는 만큼 넓어진다”고 말한 그는 “크게 보고 넓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일단 세상으로 나가라”고 조언했다.

  의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서동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법조인을 꿈꿨으나 해양경찰학과로 진학해야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고시반을 만들어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싶었지만 같이 준비할 친구도 없고 해사대 생활과 병행하기는 어려워 포기했다. 현대상선을 나와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싶었으나 가정형편 상 해양경찰간부후보생 시험을 봤다. 언뜻 보면 깊은 아쉬움과 후회만 남을 인생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직업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고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
  인생을 살며 무언가 포기해야하는 순간에도 지금처럼 달릴 수 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서동문은 “인생을 지탱하는 나만의 철학이 있는 덕분”이라고 한다. 그는 이어 자신의 대학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IMF로 갑작스레 무너진 집안 경제와 바퀴벌레가 나뒹구는 단칸방에서 사시는 부모님, 도무지 나아질 것 같지 않았던 집안형편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인 현실에도 다른 방식으로 삶을 고민했다. “나를 둘러싼 현실이 그토록 어려웠을지라도 단순히 나만을 위해 살자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며 “내가 잘 돼서 다른 이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해양경찰로 살며 국민에게 봉사하고 해양경찰교육원에서 교육생들의 꿈을 키워주는 일은 인생의 철학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음악과 글에도 관심이 많아 다양한 방면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그는 “언제나 명확한 인생을 틀을 잡고, 이를 실현하기위해 노력하라”고 전했다.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기에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상황은 분명 온다. 그리고 우리는 쉼 없이 흔들린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거친 파도가 인생의 항로를 바꿔 놓을지라도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나간 서상욱 동문, 오늘도 그는 자신만의 인생철학을 품에 안으며 ‘흔들리되 부러지지 않는 인생’을 살아간다.

윤종건 기자
jk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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