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돌아보는 적도제
[대학] 돌아보는 적도제
  • 해양대신문사
  • 승인 2016.06.02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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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 담긴 우리들의 모습
_ 지난 5월 짧았지만 강렬했던 적도제의 사흘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번 적도제는 ‘낮&이거, 밤&저거’라는 제목으로 E-sport 대회, 동아리 공연 및 클럽파티 등의 행사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었고 특히 ‘다크둠’ 입지관 공포체험이 큰 인기를 끌었다. 축제준비위원회 김영근 총학생회장은 “다크 둠, 다모토리 거리(주점) 등 축제에 ‘공포’란 요소를 도입했다”며 “이전 축제와 다르게 컨셉있는 축제를 기획해보고자 했다”고 전했다.
_ 이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이전과는 사뭇 다른 오늘의 적도제가 있고, 그 시간만큼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지금과 다른 축제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과거 축제의 이야기를 따라 가보자.
 
 
 
원색의 향연, 잊을 수 없던 그 날의 연회
_ 원색의 향연은 해사대 학생들이 토인 부족처럼 옷을 입고 서로 어울려 노는 행사이다. 이는 범선시대 적도 근해를 통과하며 바람이 불기를 기원하고 긴 항해에 지친 선원들을 위로하기 위해 주연을 베풀었던 것에 기원한다. 한국해양대신문 284호 “우리대학 축제, 알고 넘어갑시다”를 참조하면 우리대학은 인천과 진해를 전전하다 군산에 정착하여 안정을 찾은 1949년 5월에 원색의 향연의 모태인 아프리카 토인분장을 하고 춤을 추는 축제를 처음 실시했다고 한다.
_ 이후 7~80년대 우리대학의 원색의 향연은 중앙 운동장에서 이뤄졌다. 캠프파이어와 함께 연회가 시작되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클라이막스인 ‘스트리킹(Streaking)’이 시작된다. 항해학부 송재욱(항해학과·84) 교수는 “원색의 향연의 분위기가 절정에 치닫으면 숨어있던 학생 몇 명이 등장하라는 싸인을 받고 운동장으로 달려 나왔다”며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고 예도 칼 하나만 허리춤에 딱 차고 그렇게 운동장을 두 바퀴, 막걸리를 좀 마셨으면 세 바퀴까지 도는 것을 우리는 스트리킹이라 불렀다”고 전했다. 또한 원색의 향연이 2학년 행사였지만 이 스트리킹만큼은 4학년이 주인공이었다고 덧붙였다. 이에 주인공이 되려는 4학년들의 경쟁도 상당했다고 한다. 이후 건전하지 못하단 이유로 영도경찰서 측에서 스트리킹을 없앨 것을 요구했는데 1~2년 더 전통을 고수하다 법에 저촉되어 이후 스트리킹은 완전히 사라졌다.
 
▲과거의 원색의 향연
 

_ 반면 원색의 향연은 계속 이어졌는데 최근 향연 도중 2학년이 신입생에게 파스를 발사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한국해양대신문 303호(2015.06.09) “원색의 향연, 신입생들에게 파스 발사로 물의 빚어”) 이에 송 교수는 “이전엔 향연은 의식을 치른다는 성격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물리적 위해가 용인되는 행사로 인식된 것 같다”며 “본래 취지나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알리는 과정이 없다보니 그 본질이 잊혀지고 잘못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전했다. 그 결과 원색의 향연은 올해 폐지되었으며 해사대 김용진 사관장은 “시대가 변하고 사회적 인식이 달라짐에 따라 올해 원색의 향연은 시행치 않기로 결정했다”고 답했다.
 
▲2012년도의 원색의 향연
 
 
 
춤 출 때 중요한 건 역시 복장보단 파트너지
_ 우리대학은 1980년에 비승선학과가 신설되었다. 해사법학부 정영석 교수는 그 중 하나였던 해사법학과 3기(82학번) 출신이다. 정 교수는 “그 땐 일반학과가 신설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 수도 많이 없었다”며 “당시 해사대학 4학년들이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일반학과 학생들에게 동아리 활동을 권유하거나 밥을 사는 등 포용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때문에 학과신설 초창기엔 축제 대부분의 행사가 해사대학 위주였지만 일반학과 학생들의 참여도 없지 않았다. 한 예로 당시 일반학과 학생들도 해사대 연대간부의 권고로 포크댄스에 참여했다. 정 교수는 “해사대 학생들처럼 포크댄스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축제 한 달 전부터 미팅을 잡고 소개를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엔 해양대 학생 대부분이 남학생이여서 이성과의 만남 및 파트너 신청은 주로 아치섬 밖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축제 당일엔 초대받은 타 대학 여학생들이 방파제 앞에서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그는 “방파제 입구에서 입장을 돕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혼자면 입장시키지 않았다”며 “방파제 입구에서 파트너를 만나야 비로소 한 쌍을 입장시켜줬다”고 당시의 추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포크댄스가 시작하고 막상 처음 듣는 음악에 춤을 추자니 많이 서툴어 파트너의 발을 밟는 일은 다반사였다. 정교수는 “생각만큼 멋있는 그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쾌했던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포크댄스의 모습(2003년)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_ 80~90년대 동아리 활동도 축제기간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행사였다. 해양대학보 13호(1982.05.25자)에서는 축제 중 전시회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산악부_장비전시회, 기독학생회_성화전시회, 전자반_회로실체도전시회, 호우회_백범 김구선생의 사진전시회가 있으며···(후략)’ 내용이 보도되어있다. 또한 일부 동아리에선 지금처럼 주점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해사수송과학부 채양범(항해학과·78) 교수는 “동아리들이 주점 운영을 위해 강의실 책상이나 비품 등을 빌려가곤 했는데 축제가 끝나고 반드시 원상복귀 시키는 것이 철칙이었다”며 “하지만 가끔 책상이나 의자가 망가져도 실제론 크게 문제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손상된 비품들이 다음 해 원색의 향연에서 캠프파이어 재료로 쓰였기 때문이라 한다”고 말했다.
_ 그리고 당시 특별하다면 특별했던 행사가 하나 더 있었다. 그 당시의 슈퍼스타 H를 가리는 청춘들의 무대. 바로 MBS 해변 가요제이다. 당시 대학가요제가 전국적으로 붐을 일으키던 시절 우리대학은 축제기간에 맞춰 자갈마당에서 MBS 해변가요제를 열었다. 정영석 교수는 “당시 이러한 대학 자체 가요제가 성행했었는데 해변 가요제에는 좀 유명해져서 타 대학 학생들도 많이 참가를 했다”며 “전국의 쟁쟁한 실력가들이 10월의 대학가요제, 7월의 강변가요제에 앞서 5월엔 우리대학의 해변가요제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타 대학과 달리 예산을 넉넉히 지원받지 못한 우리대학은 학생들이 강의실에서 책상을 가져와 직접 무대를 설치했다고 한다. 책상이 없기에 수업의 휴강은 당연했다.
 
 
▲당시 자갈마당에서 펼쳐진 해변가요제
 
두 개가 아닌 하나의 해양대 축제로
_ 비교적 최근 우리대학 축제에 한 획을 긋는 일이 있었다. 많은 학생들은 ‘우리대학 축제 = 적도제’로 생각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도제가 우리대학의 유일한 축제였던 것은 아니다. 2010년까지의 우리대학 축제를 보면 봄에 적도제가, 가을엔 ‘아치대동제’가 있었다. ‘아치섬에서 다함께 크게 어울려 화합한다’는 뜻의 아치대동제는 ▲슈퍼스타 KMU ▲E-SPORT ▲외부 초청공연 등의 행사가 진행되었다. 한편 적도제에서는 ▲원색의 향연 ▲포크댄스 ▲퍼레이드 ▲동아리 공연 등 주로 해사대학 위주의 축제였다. 때문에 아치대동제는 적도제와 달리 일반 단과대학의 축제라는 인식이 있었다. 물론 아치대동제 때 해사대생들이 참여 못하는 것도, 적도제 때 해사대생들만 참여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원화된 축제를 따라 학생들도 서로 통합되지 못한다는 점이 줄곧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었다. 또한 정해진 예산을 둘로 쪼개 사용하니 축제 프로그램이나 홍보 면에서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 역시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에 우리대학은 몇 차례의 논의와 협의 끝에 2011년 대학축제 단일화 추진위원회에서 통합된 축제를 진행키로 결정하고 현재 공식명칭은 적도제이다.
_ 당시 재학 중이던 학생들은 이러한 결정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2012년 5월 당시 한국해양대신문의 인터뷰에 응했던 이현세(물류시스템공학과·06)학생은 “대동제와 적도제를 합친 건 좋지만 단과대 사이의 화합을 도출할 만한 프로그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며 “서로에 대한 이질감이 아직은 있는 것 같다”고 전한 바 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르랴’란 속담도 있듯이 통합된 적도제가 모든 해양대 학생들이 함께 어울릴 화합의 장이 될 진 조금 더 지켜봐야할 것이다. 올해 적도제에서 잠시 중간점검을 해보면 해사대학 재학 중인 박00 학생은 “클럽파티에서만큼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단과대학간의 화합을 이룬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그 시절의 적도제는 지금으로선 많이 낯설기도 하고 한편으론 신박하기도 하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면 축제의 주인은 바로 우리 학내 구성원들이란 것이다. 다가올 72회 적도제도 많은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대학시절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으로 남을 축제가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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