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더 어렵고 힘든 일에 부딪히길
[안녕하세요 교수님!] 더 어렵고 힘든 일에 부딪히길
  • 최원석 수습기자
  • 승인 2016.10.17 2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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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기자재공학부 명예교수 김영식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 코너는 학우들과 함께하지만 쉽게 여쭤볼 수 없는
교수님의 학창시절, 교직생활 등 교수님의 삶을 이야기하는 공간입니다.

 

 

조선기자재공학부 명예교수 김 영 식 교수님


명예교수 : 대학교 또는 대학에서 교원으로 재직하다 퇴직한 자 중에서, 그 재직 중의 업적이 현저한 자를 추앙(推仰)하기 위해 당해 대학교 또는 대학에서 추대한 자.

 

교수님과의 첫 대면은 얼떨결에 학과사무실의 문 앞에서 이루어졌다. 인터뷰 내내 조용조용하신 어투이셨지만 강단 있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1시간 반 동안의 인터뷰. 그 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교수님의 고향이 진도 군내면 맞으신가요?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_ 어렸을 적 고향이 바닷가 마을이었고 아버지는 가난한 농사꾼이셨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농사일을 거들러 가곤 했다. 이따금씩 농사일을 도우러 가지 않고 동네 친구들과 목까지 차오르는 갯벌에 가서 바닥에 자라고 있는 진쥬르라는 해초류를 캐고 뿌리를 먹으면 달콤한 맛이 났다. 낙지도 잡곤 했는데 갯벌에 있는 낙지의 출입구를 막아놓고 나중에 다시 막은 곳을 열면 낙지가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 때 재빨리 손으로 낚아채면 낙지를 잡을 수 있었다. 멋모르는 시절을 보내면서 어쩌다 동네 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저 멀리 육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때부터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해양대학교로 오시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_ 공부에 임하면서 더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었던 꿈이 있었지만 학비를 부담하지 못할 정도로 집안이 가난했다. 중학교까지의 거리가 왕복 20km 정도였는데 오고가면서 수업시간에 배웠던 것들을 공부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 때문에 책은 손에 닳고 비 때문에 종이가 젖어 완전히 헤어진 상태가 될 정도였다. 아버지는 농사꾼으로 키우실 요량이셨지만 나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광주의 고등학교 입학 시험장에 갈만한 여비도 여의치 않아 절망하고 있던 때, 때마침 선생님께 목포해양고등학교라는 학교에는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교육을 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그 고등학교에 지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우리 대학에서도 학생들에게 등록금과 숙식을 해결해 주었는데, 그 당시 가난했던 학생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학업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던 나는 우리 대학에 지원을 하였고 마침내 입학을 하게 되었다.


대학교 진학 후 어떻게 보내셨나요?


_ 그 당시의 해사대학은 지금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엄격했고 훈련량도 많았다. 우리 대학에 입학하면 전원 ROTC 교육을 받게 되어 있었고 생활은 군대와 유사한 수준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동기들이 적응하지 못해 나가기도 했고 성적 제한도 있어 유급한 학생들 또한 많았다. 학교를 졸업했을 당시에 우리 나라는 월남전에 참전하고 있었는데, 나라에서 장교들을 강제적으로 차출하고 있었다. 나도 그 중에 뽑혀 6개월 간 훈련을 받고 소위로 시작하여 2년간 월남전에 참전했다. 1974년에 시행된 일본문부성초청 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 때 당시 한국에서는 대형 조선소가 건설되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용접 분야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 생각해 일본 용접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교수님 밑으로 들어갔다. 일본말이 서툴러서 1년 동안은 실험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 후 하나하나씩 귀에 들려오면서 원활한 대화가 되기 시작했다.


_박사 학위를 받은 후 다시 우리 대학으로 돌아와서 학생들을 가르쳤었는데 그 때는 학교의 교수들이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교수가 학생들의 관리 감독 당직을 서고, 강사로서의 직도 겸해야 했기에 연구를 행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 아쉬웠다.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면서 새로이 느꼈었던 일들이 있었나요?


_ 학생들의 수가 150명 가까이 되었던 데에 반해 교수들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여 3개의 분반으로 나누어서 수업하였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50명의 학생들을 놓고 혼자서 강의하던 때에는 그저 칠판의 내용을 받아 적는 주입식 교육이 진행되자 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조를 짜게 하고, 학생 스스로 수업 내용을 발표하게 하는 등 학생 스스로 수업 내용에 대해서 생각하게끔 유도하는 방식의 수업을 진행하였다. 내 실험실의 대학원생에게도 스스로 주제를 찾아서 실험을 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것이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수님의 그림 작품이 해과기대 1층이나 공과대 각 층에 비치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시게 되었나요?


_ 길거리에 예술 작품이 걸려 있으면 멈춰서 감상하는 등 예전부터 평소에 그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정년퇴직이 다가오던 2002년 무렵에 뭔가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마침 군대 후배의 미술 작품 전시회를 가면서 후배에게 여러 정보를 들으면서 혼자 찾아보았는데 이때 본격적으로 미술의 영역으로 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후 부산에 어느 화백의 그림 블로그를 통하여 인연을 맺게 되어 다대포에 위치한 화실로 그림을 배우러 다니게 되었다. 그림을 그릴 때 만큼은 정말로 몰두하게 되고 그 동안의 지쳐있던 몸에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다. 요즘도 일주일에 2번 정도 화실로 가서 그림을 그리곤 한다. 현재 부산미술협회에 가입을 했고 올 10월에 열리는 전시회에 나의 몇몇 작품을 내걸 계획이다.


후배이자 제자인 한국해양대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나요?


_ 학생들이 배우면서 해외와 같은 더 넓은 곳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쉬운 길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기에 좀 더 어렵고 힘든 일에 부딪히길 바란다. 그리고 공학도의 길을 걷고 있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그림이나 음악 등에 투자를 해서 감수성을 길렀으면 한다. 또한 예전에는 교수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 가장 중요한 시대였다면 이제는 그러한 지식은 손가락 끝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예전과 비교해서 중요성이 낮아졌다. 요즘 시대에는 그러한 정보들을 스스로 찾는 능력과 찾은 정보를 쓸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학생들이 가능한 많은 학문분야를 접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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