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인생에 공짜 점심은 없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인생에 공짜 점심은 없다!
  • 윤종건 기자
  • 승인 2016.11.29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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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금융학과 이재민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
_안녕하세요. 교수님 코너는 교수님께서 항상 학우들 곁에 계시지만 어렵거나 잘 모르는 우리들을 위해 교수님이 어떻게 삶을 살아오신지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인생에 공짜 점심은 없다!

해양금융학과 이재민 교수님.

 

▲ 해양금융학과 이재민 교수님

 

- 1980.  연세대 응용통계학과(학사)
- 1993.  일리노이대학교(어바나샴페인) 경제학 석사
- 1995.  일리노이대학교(어바나샴페인) 경제학 박사
- 1980. ~ 2011. 한국수출입은행 근무
- 1987.  경제협력기금부 심사역
- 1997.  해외투자연구소 팀장
- 1998.  산업경제실 실장
- 2000.  국제협력실 실장
- 2002.  해외경제연구소 소장
- 2007.  여신총괄부 부장
- 2008.  선박금융부 부장
- 2009. ~ 2011. 한국수출입은행 부행장
- 2012. ~ 현재  한국해양대학교 해양금융학과 교수

금융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다
_사실 처음부터 금융인을 꿈꿨던 것은 아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국제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인기 있던 종합상사에 취직해 해외무역 관련 일을 할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먼저 수출입은행에 다니고 있던 친구 하나가 수출입은행이 금융업인 동시에 대외 지향적 업무가 많다며 취업을 권했다. 알아보니 나와 잘 맞을 것 같아 본격적으로 시험을 준비했다.

_합격 후 수출입은행에 입사 해 31년간의 금융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정말 내 평생을 수출입은행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내가 입사한 1980년은 우리나라의 해외차입이 상당히 활발히 이루어진 때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국책은행이기 때문에 이 두 기관이 정부를 대신해 해외차입을 담당했다. 나도 관련 업무에 대해 완벽히 모르니, 정말 밤새도록 채권 계약서를 읽고 또 읽고, 계속 공부했다. 학부생 시절 경제공부를 했음에도 실무는 또 다르더라. 일을 하면서 이론도 중요하지만 실무적인 능력을 키우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생각이 이어져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칠 때면 이론과 더불어 실무적인 능력을 배양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_시간이 흘러 1987년 경제협력기금부에서 일할 때다. 우리나라 경제가 날로 좋아지면서 해외에 원조를 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원조는 크게 2가지로 나누어진다. 무상원조의 경우 외교부 주관 하에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시행한다. 그리고 유상원조는 재무부(지금의 기획재정부)에서 주관하고 수출입은행에서 시행한다. 수출입은행에 몸담고 있던 나는 유상원조의 시작을 함께했다. 국가적으로도 처음 하는 일이다보니 유상원조를 취급하는 규정, 절차, 차관협의, 사후관리 등을 구축해야 했다. 약 30년이 흐른 지금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유상원조의 규모가 커졌다. 이렇게 유상원조 제공이 활발한 걸 보면, 그 때 창립멤버 중 한명으로 발판을 만들었다는 것에 큰 뿌듯함을 느낀다.

행복했던 유학시절
_1991년은 내 인생에 참 중요한 해다. 회사에서 직원들 연수를 위해 미국이나 영국으로 해외 유학을 보내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그 중 하나가 유학시절이다. 난 그 해 가족과 함께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어바나샴페인)에 진학해 2년간 경제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학부 졸업 후 약 10년이 지나 다시 시작한 공부여서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스트레스 없이 공부만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더라. 게다가 학부 과정에선 느낄 수 없던 학문에의 열망이 생겼다. 말 그대로 공부가 재밌었다.

_1993년에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회사의 지원은 석사로 끝이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휴직하고 사비를 들여 박사과정을 밟기로 결정했다. 물론 당시 와이프와 초등학생 아들까지 있어 생활비에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1995년에 경제학 박사학위까지 따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 박사학위까지 따고 오길 정말 잘했다. 내가 석사만 따고 돌아왔더라면, 은행퇴직 후 우리 대학 교수로 오지 못했을 것 아닌가?

_현재 유학을 고민하는 학생들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 학생들은 꼭 미국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하고자하는 전공을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았으면 좋겠다. 단순히 공부하는 것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에 참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금융업에 계속 종사했던 나에겐 유학시절 공부했던 경제이론들이 업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 알게 모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일단 구제한 조선사, 속단하긴 이르다
_유학 후 약 12년 가까이 여러 업무를 지나 2008년 선박금융부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2009년 부행장 때도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2008년 당시는 해운경기가 더욱 나빠지면서 중소조선사들의 문제가 대두된 때이다. 우리는 중소조선사들에 지원을 늘리기로 결정했다. 성동조선, 대선, SPP만큼은 국내 조선 산업을 위해 반드시 살려야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상당히 많은 자금이 그 회사들로 들어갔다. 계속된 자금지원에도 조선사들의 결과가 안 좋다면 우리의 당시 방향 설정을 잘못 한 것이겠지만,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고 본다. 계속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한다. 아직까지 상황이 나아지거나 해결되지 않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국내 최고의 해양금융전문가를 위해
_조선·해운은 국가 기간산업이다. 말할 필요 없이 우리 경제에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 산업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금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즉, 이들을 지원할 금융 인프라 특히 ‘해양금융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 해운·조선은 대부분 외국에서 자금을 빌려왔다. 즉 해양금융이 해외에 집중된 것이다. 국내 선박금융을 다루는 이들 마저 국내 대학에서 가르치는 곳이 거의 없어 직장에 들어가 상사에게 배우는 형편이다. 지금 조선·해운업이 매우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지 않고 더욱 커가기 위해선 국내 해양금융 인프라를 더욱 구축해가야 한다. 우리대학에 해양금융 전문학과가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고, 앞서 말했듯이 이론과 더불어 실무에 최적화된 인재양성에 노력하고 있다.

달라진 사회만큼 달라진 대학
_이제 대학을 온지 6년 차에 접어든다. 사회가 여러 차례 변화를 겪으면서 대학 또한 크게 달라졌음을 느낀다. 내가 대학을 다닌 70년대만 하더라도 유신정부시절이었다. 대학생임에도 지나가는 경찰한테 잡혀 머리를 깎이고, 음악도 마음대로 못 듣고, 영화도 자유롭게 못 보고, 데모는 연례행사였다. 공부에 전념하기는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보다는 일자리 찾기가 쉬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파른 경제 성장만큼 일자리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대학에 와 교수로서 학생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 지금 학생들에게 쏟아지는 압박감과 치열한 스펙 경쟁은 정말 엄청나다. 그래서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 선 내가 사회에 나갈 학생들에게 더욱 큰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낀다.

인생에 공짜 점심은 없다!
_요새 사회에 수저론이 대두되고 있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수저로 사람의 계층을 구별하는 것이다. 몇몇 학생들은 “내가 해봐야 뭘 얼마나 하겠어”하며 자조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것인가? 노력하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힘써서 해보자! 시간에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반드시 대가가 온다고 믿는다.

_그리고 더불어 요행을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오랜 직장생활을 경험한 나로서도 분명히 ‘좀 아니다’싶은 사람이 진급도 좀 빨리하는 것 같고 윗사람한테 인정도 받는 것 같아 속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오래가지 못하고 중간에 도태되더라. 잠깐의 요행은 통할 수 있겠지만 길게 가지 못하는 것이다. 난 삶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다. 언제나 인내심을 갖고 성실하게 살자. 인생에 공짜 점심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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