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에 서서] 몸으로 소통하기
[강단에 서서] 몸으로 소통하기
  • 한국해양대신문사
  • 승인 2017.06.07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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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우리나라는 지난 4년 내내 소통이 화두였다는 것을 촛불집회의 기간과 참여인원수 그리고 며칠 전 언론이 발표한 국민의 현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87퍼센트란 여론조사를 보면 확신할 수 있다. 그런데 아주 특이한 것은 이 소통의 성격이다. 현대통령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고 그의 행동은 상식과 바른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 같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행동에 감동하고 어느 순간에는 울컥하며 또 가끔씩은 ‘사이다’를 맛본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면서 정상의 고귀함을 재발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치유의 상태에 있는 듯하다.

_이제 학교로 눈을 돌려보자. 행동이란 관점에서 교수와 학생 사이의 소통은 그렇게 많은 문제는 없고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교수와 학생 사이의 관계는 우선 긴장관계로 시작하는 게 아닐까? 알지 못하던 교수와 학생들이 만나 인연을 가지게 되는 것은 강의이다. 강의는 평가라는 것이 따른다. 교수는 평가자이고 학생은 그 평가를 받아들여야 하는 자다. 이런 관계로 생길 수 있는 억울함을 고려하여 학생들이 교수평가를 하고 학점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제도도 마련되어있다. 결국 양자는 짧지만 한 학기라는 긴장관계를 기말고사라는 ‘전쟁’을 끝으로 결별한다. 여기서 소통의 의미는 무엇일까? 무언가를 주고받는 것이란 형식은 맞지만, 상식적으로 머릿속에 있는 소통의 의미가 전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_대학교는 입력과 출력만으로 이루어진 기계와 같은 체계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다. 기계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이용하는 이유는 보다 인간적인 삶을 영유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학생들은 점점 기계화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 알다시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더 이상 대학교는 이상을 심각하게 고민하면 안 되며 가장 현실적 먹거리를 찾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곳이어야 하는 것처럼 낙인이 찍히고 있다. 이 커다란 압력이 학생들과 교수사이의 소통의 부재를 조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체계의 논리를 아무런 말도 못하고 따라가야 하는가? 누군가가 나를 대변해서 세상의 불편을 변호해 줄 사람이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최선일까?

_대학입학이 생존적 경제문제의 해결에만 이유를 부여한다는 것은 비극이지 않을 수 없다. 학생들이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 쉬운 휴대전화가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 듯이 청춘의 가장 값진 시간인 대학 4년을 오로지 직업전선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기간으로 만든다는 것은 비극적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_이 세상의 변화는 기계처럼 예측할 수 있게 변화하지 않는다. 수 없이 알 수도 없고 알지 못하는 많은 변수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인생의 묘미도 돌발적 사건이 자아내는 맛이다. 대통령이 바뀌고 난 뒤 갑자기 많은 기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이다. 갑자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꾼다고 난리다. 이것은 나비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_이제 학생과 교수의 소통의 본질을 찾아보자. 교수는 지식을 전달하는 기술자가 아니다. 교수는 강의를 통해서 학생들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며 창의력으로 가득한 한 시민의 모습을 가꾸어가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조력자이다. 대학의 강의는 고등학교까지 하던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던져진 문제를 의심하고 비판하면서 ‘나’ 스스로가 확신할 수 있는 해결점을 찾아가는 힘을 키우게 하는 격투장이다. 적을 신중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무참히 얻어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비참해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경험을 통해 또 다시 비참해지지는 않을 것이니까. 학생들의 맷집을 키워주는 스파링 파트너가 교수이다. 그를 괴롭혀라.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스파링 파트너는 더 기뻐할 것이다. 이것이 소통의 본질이다.
 
_소통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하는 것이다. 손으로는 필기구로 노트를 짓누르고, 입은 질문과 토론으로 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소통하지 못했던 이유는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의 한계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계를 없애고 무한한 가능성과 절대적 긍정성만을 생각하면서 교수와의 소통을 시작하면 어떨까? 어떻게 변할지 모를 세상사에 의지하여 따라갈려고만 하지 말자. 내가 그 알 수 없는 변화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학생들의 앞에 서있는 인생의 선배이자 학문의 스승인 교수와 몸으로 소통하는 것임을 신중하게 고려해 보길 바란다.

 

해사글로벌학부 이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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