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한진해운의 몰락!? 이유가 뭔데!
대기업 한진해운의 몰락!? 이유가 뭔데!
  • 김기태 객원기자
  • 승인 2017.06.07 17: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_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으로는 휴전 중인 북한이 무역로를 막고 있어 사실상 섬과 같은 지리적인 위치에 있으며, 매장자원 또한 부족하여 수출의존도가 높은 나라.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러한 실정에서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수출을 위한 필수적인 사업이 해운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중에서도 한진해운은 1977.05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선사, 1992.12 국적선사 최초 매출 1조 원 돌파, 2012.12 최초 매출 10조 달성, 2005.09 포브스 아시아 50대 우량기업에 선정, 세계 7위 해운사 등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총직원 수 3900명에 달하는 거대한 회사였다. 이런 기업이 왜 갑자기 파산하게 된 것일까? 원인을 시간의 순서로 분석해 보자

  연표

1977.05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선사 ()한진해운 출범

1988.12 대한상선과 한진해운 합병, 오늘의 한진해운으로 재출범

1992.12 국적선사 최초 매출 1조 원 돌파

1995.02 거양해운 인수

2001.06 미주대륙 컨테이너 운송 자회사 Hanjin Logistics inc. 설립

2005.09 포브스 아시아 50대 우량기업에 선정

2008.07 자회사 거양해운 흡수 합병, 세계 10위권 벌크선사 부상

2009.12 지주회사 한진해운홀딩스 출범

2012.12 국적선사 최초 매출액 10조 원 달성

2014.04 조양호 회장, 대표이사 회장 선임

2016.05 채권단 자율협약 개시

2016.08 채권단 자율협약 종료

2017.02.17. 09시 한진해운 파산 선고

1980 - 1999

 _시간을 거슬러 1970년대 1980년대 한국과 동남아시아는 경제발전이 크게 이루어졌고 1990년대 많은 외국의 자본들이 한국에도 유입되었고 금융 자유화와 금융 시장 개방 등으로 외국의 자본이 빠르게 유입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융기관들은 이 자본을 빌려 기업어음을 사들였고, 자연스럽게 외국에 진 빚 또한 늘어났다. 그런데 어음을 발행한 기업들이 부도가 나자 어음을 사들인 금융기관 또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후 1997년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가 어려워지며 외국 투자자들이 빌려준 자본을 빠르게 거두어들이며 한국의 경제에도 불안감을 느낀 그들은 투자한 자본을 회수했다.

 _외국자본이 빠져나가면서 많은 기업이 문을 닫게 되었고, 한국의 보유 외환도 급속히 줄어들어 IMF에 긴급 자금을 요청했다. IMF는 지원을 해주는 대신 기업의 구조조정, 공기업의 민영화, 자본시장의 추가개방, 기업의 인수합병 간소화 등의 여러 조건을 걸었고 한국은 조건을 수용했다. 이러한 외환위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19983, 정부는 국내 재벌기업에 1999년 말까지 부채비율을 200%로 낮추라는 요구인 ‘200% 이 한진해운 사망의 이유 중 하나이다. (부채비율= 총 부채/총 자기자본)

  _한 척에 수백억부터 수천억 원에 달하는 선박을 해운사의 자기자본만으로 구매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따라서 은행에서 돈을 빌려 구매를 하는 것이 해운산업의 특성이다. 그러나 은행에서 돈을 빌려 선박을 구매할 경우 이 200%의 부채비율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물론 이러한 해운산업의 특성을 고려해 해운업은 200% 룰의 예외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19999월 해양수산부는 산업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일률적인 부채비율 기준은 많은 문제가 있다.”라며 해운업의 예외 허용을 추진했으나 외환위기 속에서 위기극복을 위해 예외는 없다는 논리에 막혀 해운업도 200%룰을 수용했다.

 _이러한 규제 속에서 해운사들은 신조선의 구매는 엄두도 못 낼 뿐만 아니라 이미 빚을 내서 샀던 선박조차 팔아야 했다. 당시 국내 해운사들은 110척의 선박을 앞다투어 매각했으며 워낙 서둘러 팔다 보니 헐값매각 논란까지 나왔다. 당시 중국과 일본 등 경쟁국의 경우 국적 해운사들은 정부 지원을 받아가며 선박을 매수해 경쟁력을 높여 나갈 때 한국은 부채비율을 맞춰야 해서 선박을 구매하지 못하고 비싼 용선료를 지불하고 선박을 빌려 사용하게 되었다.

 

▲ BD(발틱운임지수)

 

▲ 한진해운의 매출액과 당기순이익

 

2003~ 2014

 2003

_한국의 해운사들이 200%룰 때문에 선박을 내다 판 직후인 2003년부터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전 세계의 해운 호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국은 호황이 시작되었음에도 보유 선박이 없어 비싼 용선료를 부담하며 선박을 빌렸다. 또한, 용선은 보통 15년 이상의 장기용선이 많아 불경기에 접어들면 부담이 크다는 문제도 있다. 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괄적인 규제로 인해 한국의 해운사만 손발이 묶여 큰 손해를 본 꼴이다.

 _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수출입 물량이 급증하면서 해상 수송에 대한 주문이 폭주했다. 하지만 정작 화물을 실어 나를 선박이 부족했다. 2006년 해운 운임이 전년 대비 50% 가까이 급락하자 불황에 대비해 선박을 확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해운사들이 선박 확보 경쟁을 펼쳤다. 2007718척이던 국내 해운사의 보유 선박 수는 2008828척까지 늘었다. 하지만 올림픽 직후 중국의 원자재 수입량 증가세가 둔화한 데다 20089월에는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신청을 하면서 세계 경제 위기가 터져 미국·유럽의 경제마저 추락했다. 2008511793을 기록했던 발틱 운임지수(BDI 지수)는 그해 말 671로 급락했다. 고꾸라졌던 글로벌 해운 시장은 2010 ~ 2011년 양적 완화 정책으로 미국 경제가 회복되면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2012년 머스크 등 거대 해운사들이 18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투입하자 해운 운임은 다시 급락했다. 그해에만 국내 4대 해운사는 총 220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더구나 2008년과 2010년 호황기 때 용선료만 급등했다. 한진해운의 발목을 잡았던 높은 용선료도 그때 계약한 것들이다.

  _200611, 한진해운의 회장이었던 조수호 회장이 별세한 뒤 조수호 회장의 부인인 최은영 회장이 선임되었다. 문제는 2007년부터 최은영 회장은 해운업은커녕 기업 경영 경력도 없었다. 2003년부터 지속한 호황에 길든 경영진과 경영에 대한 지식이 없는 최은영 회장은 높은 용선료로 장기계약을 했고 2011- 20144년 연속 적자를 냈으며 손실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또한, 최은영 회장이 재임한 7년 동안 부채비율은 155% -> 1,445%9.32배 늘어났다. 이런 와중 최은영 회장은 급여와 배당금으로 253억 원을 챙겼다. 2014년 경영권을 조양호 회장에게 넘길 때도 급여와 퇴직금 명목으로 97억 원을 챙겼으며 시가 2,000억 원이 넘는 자산들을 챙겼다. 회사와 투자자의 이익이 아닌 개인의 이익을 위해 회사를 운영한 것이다.

  _이러한 원인으로 인해 어찌할 도리가 없이 기울어진 한진해운을 2014년 조양호 회장이 경영권을 인수받은 뒤로 회생시키려 노력했으나 실패하게 되었고 2016.04 한진해운의 경영권을 채권단에게 맡기고 회사를 살리기 위한 추가자금을 요청하며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이때도 최은영 전 회장은 자율협약 신청 이틀 전에 한진해운의 주식 30억 원어치를 팔아 10억 원 이상의 손실을 면했다. 20168월 한진해운은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고 채권단, 한진그룹, 정부는 서로 책임을 미루며 눈치만 보았다. 결국, 201721709시 법원에서 파산선고가 내려져 40년의 역사, 세계 7위의 해운회사인 한진해운을 우리의 곁에서 떠나보내게 된 것이다.

  2부에서는 한진해운 사태가 한국해양대학교 재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한진해운 사태를 바라보는 견해에 대해 알아보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