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 선배] 시작하기에 늦는 것은 없다, 시작하면 후회도 없다
[기자가 만난 선배] 시작하기에 늦는 것은 없다, 시작하면 후회도 없다
  • 김현지 수습기자
  • 승인 2017.09.01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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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우근 동문 (대원01·전파공학과)

 

_이번 315호 <기자가 만난 선배>에서는 전(前) KBS 부산총국 기술국장 박우근 동문(대원 01·전파공학과)을 만났다. 그가 60여 년 간 겪어온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에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열망과 뚜렷한 신념이 보였다. 또한 30대 중반, 해양대학원으로 오며 공부를 다시 시작한 그에게서 끝없는 배움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쉼 없이 달려온 길
_80년대 초 KBS 신입사원 공채에 합격한 박우근 동문은 만 58세로 KBS에서 정년퇴임하기까지 평생을 기술직에 몸 담고 있을 만큼 맡은 업무에 애정이 컸다. 또한 방송국이라고는 KBS와 MBC 밖에 없는 시절, 공영방송인 KBS에서 일한다는 남다른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신입사원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엔지니어는 방송국의 하드웨어를 맡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한 가지 분야를 맡는 것이 아니라 방송을 위한 모든 기술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라디오 방송의 경우는 ‘송신’이라는 이름 아래 ‘아나운서의 음성을 원음에 가깝게 송출하는 기술’이나 ‘음반을 다루는 요령’ 등 다양한 기술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이 있었기에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기술국장으로서 정년을 마칠 수 있지 않았겠냐며 박우근 동문은 자랑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 박우근 동문이 울산방송국 TV조정실에서 근무하는 모습(맨 오른쪽)


_본사 연수원에서 몇 달 간의 신입사원 연수를 마친 박우근 동문이 엔지니어로서 처음 발령받은 곳은 경북 안동방송국 청송 중계소였다. TV가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 청송 중계소는 오직 KBS1 라디오 채널 하나만을 송출하는 곳이었다. 이처럼 작은 규모 탓에 청송 중계소에는 소장을 비롯해 엔지니어 3명, 아나운서 1명, 경비원 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총 7명이었지만 그도 교대 근무였기 때문에 근무시간에는 엔지니어 1명, 아나운서 1명, 경비원 1명으로 운영되었다. 아나운서가 퇴근한 야간에는 엔지니어 1명과 경비원 1명으로만 근무해야 했다. 소수로 운영되는 점도 힘들었지만 그 당시 지방 라디오 방송은 새벽 5시에 방송을 시작해 밤 12시에 종료하는 방식이었다. 방송 시작 전에는 최소 30분 정도 송신기 예열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때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박우근 동문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_박우근 동문이 청송 중계소에서 근무하던 시절, 새벽에 정전이 되어 오전 방송을 아예 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라디오 송신기를 키려면 발전기가 필요한데 비상용 발전기의 시동 배터리가 방전이 된 탓이었다. 당시는 인터넷이 발달한 때도 아니었고, 동네가 시골인 덕(?)에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던 일이었다며 박우근 동문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_80년대 중후반, 박우근 동문은 안동에서 포항방송국 울릉 중계소를 거쳐 울산 방송국으로 발령받았다. 울산방송국은 이제 막 개국한 참이라 청사는커녕 보험회사 건물의 7, 8층을 빌려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 당시는 사회적으로 민주화 운동과 시위가 많이 일어나는 시기였기에 방송국 앞까지 찾아와 시위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온갖 물건을 방송국으로 던졌지만 다행히 7층의 높이라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아찔한 추억이라고 한다.
_안동과 포항에서는 주로 라디오 중계를 했지만 울산 방송국은 달랐다. 기본적인 라디오 제작부터 TV 음향·영상·기술 감독, 그 외의 기술행정 업무 등 모든 기술에서 프로가 되어야만 했다. 일이 고달팠을 법도 한데 박우근 동문은 울산방송국에 있을 때가 본인의 청춘이 빛을 발했던 시기라며 그 시절을 추억했다.
_울산 방송국을 지나 창원방송국에서 10년가량 근무할 때 박우근 동문은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을 선택했다. 창원 방송국에서는 주로 TV송신소에서 교대 근무를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던 그는 비번인 날마다 창원에서 조도로 들어와 공부를 계속했다. 박우근 동문은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타대학 외래강사를 하기도 하며 엔지니어만이 아닌 학생이자 강사로서 또 다른 이름을 떨쳤다. 이후 2006년 부산방송총국으로 발령받아 기술관리 부장, 기술국장으로 60년의 정년을 채웠다.

 


그를 지탱해주는 원동력
_박우근 동문의 사랑 역시 대단했다. 그는 대학시절 만난 아내와 현재까지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많은 역경이 있었다. 박우근 동문이 안동방송국 청송 중계소에서 포항방송국 울릉 중계소로 발령 받은 때, 둘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결혼식 일정이 정해지고 박우근 동문이 육지로 잠시 떠나야 하는 날이 왔다. 80년대 중반, 육지와 울릉도를 이어주는 배는 하루에 4, 5대 뿐이었다. 그나마도 날씨가 좋지 않으면 결항되는 일이 태반이었는데 그 날 역시 그랬다. 폭풍 탓에 배가 결항되어 일주일 가까이 배가 끊긴 것이다. 박우근 동문이 결혼식을 미뤄야 할지 고민하던 도중 다행히 결혼식 바로 전날 임시 배가 한 대 떴다. 덕분에 그 배를 타고 결혼을 무사히 올릴 수 있었다.

 

▲ 고향이 가덕도의 감나무 밭


_그들의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결혼식을 올리긴 했지만 울릉도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기에는 마땅치 않았다. 80년대의 울릉도는 사람이 사는 섬이라기보다 오지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러한 이유로 박우근 동문은 울릉도에서, 아내는 시댁에서 박우근 동문의 부모님과 함께 1년 여 간을 따로 생활하게 되었다. 후에 박우근 동문이 울산방송국으로 발령 받으면서 그제서야 신혼생활을 꾸릴 수 있었다고 한다.

 

 

 

 

 

_고향이 가덕도인 박우근 동문은 농사에도 빠삭했다. 특히 가덕도에 있는 감나무와 뽕나무를 애지중지 기르고 있다. 취미치고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나무의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면 그 뿌듯함과 성취감이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박우근 동문은 요즘 꾸지뽕에 가장 빠져있다고 말했다. 마치 자식들을 기르듯 나무들이 잘 자란 모습을 보면 좀더 가꾸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며 박우근 동문은 자신의 애정을 표현했다.


끝나지 않는 배움과 열정

 

▲ 2014년 박우근 동문의 KBS 퇴임식


_2014년도에 KBS를 정년퇴직한 박우근 동문은 작년 3월부터 부산환경공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퇴임을 한 후 몇 개월 간 휴식기간을 가진 그였지만 여전히 공부와 일에 대한 열정은 넘쳐 보였다. 지인의 소개로 캄보디아에서 방송국 건설을 기획하기도 하고 타대학에서 다양한 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런 그가 현재 몰두하고 있는 일은 부산환경공단에서 교대 근무를 하며 더 나은 노후를 위해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다. 만 60세의 나이지만 그의 열정은 그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고 있다.

 


‘살아서 굴욕을 받느니 차라리 분투 중에 쓰러지자‘
_박우근 동문만큼 청춘을 불태웠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퇴임한 후에도 여전히 열심히 달리는 중인 그는 후배들에게도 본인의 신념을 전했다. 박우근 동문은 “시간이 지나고 보니 후회라는 단어는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때 하지 않으면 놓치는 기회가 많으니 학창 시절에 하고 싶은 일이든 해야만 하는 일이든 가능한 한 많이 해봤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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