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가야사 복원 사업, 어디로 가야하나?
부산 가야사 복원 사업, 어디로 가야하나?
  • 조경인 기자
  • 승인 2017.12.2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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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금관가야 [金官伽耶]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가야 [伽倻]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제신문] ‘가야사 복원 나선 부산… 정체성 확립 연구총서 발간부터 출발’

_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가야사 복원’ 사업을 꼽았다. 이는 가야가 위치해 있던 김해, 진주, 고성, 함안, 부산 등의 지역에서 가야의 유적, 유물 등 흔적을 찾는 사업으로 투입되는 예산 또한 적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가야사 복원 사업의 의미
_가야사 복원 사업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역사적 의미다. 문재인 대통령은 “고대사는 삼국사 이전의 역사가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측면이 있고, 특히 가야사는 신라사에 덮여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며 가야사 복원 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역사 왜곡에 맞서 우리 고대사를 바로세우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지역 화합의 측면으로 이번 사업을 통해 영남과 호남, 충청 지역의 화합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와 별개로 일각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추진되었으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미뤄진 사업을 재개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_그렇다면 지금까지 다른 고대사에 비해 가야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야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야의 숨은 이야기
⑴ 가야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_가야는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 사이에 위치해 있던 연맹왕국이다.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발달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했으며, 왜와 교류하기도 하며 국력을 키워 나갔다.
_그러나 아직까지도 가야를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보지 않는 시선도 있다. 4세기 초부터 7세기 중엽까지 가야도 존재했으나 이 시기를 ‘삼국시대’라 부르며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앙집권국가였던 삼국과는 다르게 가야는 여러 명의 왕이 통치하는 연맹국가였고, 연맹국가에 머물러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의 집권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야를 국가로 보지 않는 것이다.
⑵ 신라에 가려진 <삼국사기>의 가야
_삼국에 비해 가야의 역사가 충분하게 전해지지 않는 데에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의 영향이 크다는 학설도 존재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함에 있어서 2가지 원칙을 두었는데 첫 번째는 ‘한반도 중심주의’이고 두 번째는 ‘신라 중심주의’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두 번째인 ‘신라 중심주의’이다.
_김부식은 신라가 멸망한지 140년 뒤인 1075년에 출생한 신라 왕족 후예로 그에게는 신라 왕족 의식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묘청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기 집안 조상들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_신라 중심주의를 목적으로 그가 벌인 또 다른 역사 왜곡은 가야사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991년간 존속했다. 991년이란 기간 중에서 신라의 경쟁자가 고구려·백제 두 나라뿐이었던 삼국시대는 고작 106년간이다. 그런데 신라의 경쟁자가 고구려·백제·가야 세 나라였던 사국시대는 42년부터 562년까지의 520년간이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김부식은 자신의 역사서를 4국이 아닌 3국의 역사로 만들었다.
_위와 같은 김부식의 ‘신라 중심주의’로 인해 결과적으로 신라에 가려져 가야의 역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만 가야에 대한 역사를 배움에 있어서 한번 쯤 생각해 볼 논제이다.

부산의 가야사
_가야는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주로 경상남도 대부분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고대 국가이다. 경제적‧문화적으로 발달해 여러 가야의 맹주국이 되었던 금관가야와 대가야가 위치했던 곳이 김해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김해를 가야사 연구의 핵심으로 꼽는다. 또한 금관가야의 건국 신화는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부산 지역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쉽다.
_그러나 부산도 가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고대 부산 지역은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영역에는 속하지 않지만 한동안 가야에 속하던 곳이다. 몇 가지 자료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 복천박물관에 전시된 가야영역 지도


① 탈해의 이동 경로
_건국 신화에는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으로 오니……”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라가 금관가야를 침공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탈해의 출자(出自)는 지금의 울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울산에서 바다를 따라 김해로 침공해 들어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산을 경유해야만 한다.
② 토기 문화 공유
_김해 대성동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외절 구연 고배’라는 지역성이 강한 토기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이것으로 부산을 금관가야를 구성하는 한 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③ 복천동 고분군
_5세기 전반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왕급 무덤의 축조가 중단되지만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경우 계속 축조된다. 이는 금관가야의 패권이 김해 지역에서 부산 지역으로 옮겨 왔다고 볼 수 있다.

부산의 가야사 복원사업
_이와 같이 부산에서 가야의 흔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현재 부산에서도 가야사 복원 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부산 가야사 복원 사업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① ‘가야의 길’ 가야 문화 체험벨트 조성
_수영강·온천천을 따라 형성된 가야 문화재(노포동 고분군~복천동 고분군~동래 패총~연산동 고분군~배산성지 총 12㎞)를 잇는다.

▲ 가야의 길 경로

② 복천동고분군 발굴 조사와 정비
_복천동고분군은 부산의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삼한·삼국시대인 기원 전후에서 5세기에 주로 만들어진 부산 지배층의 무덤이다. 지금까지 8차례의 계획 조사와 수차례의 긴급조사를 통해 10,000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특히 철로 된 무기와 갑옷이 많이 나온 유적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아직 전모를 밝히지 못한 만큼 계속해서 발굴 조사와 정비가 이루어질 계획이다. 현재는 복천박물관이 지어져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당시의 가야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 복천박물관
▲ 복천박물관 내부 전시장

③ 동래패총 발굴조사와 정비
_동래 패총 일대는 복천동 고분군에 묻힌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부산지역 금관가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철 생산시설, 저장시설, 패총이 남아있는 대규모 유적지이지만 현재 유적 일부만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_위 사업 외에도 17개의 사업이 추진되며 2000억 원대의 사업비가 투입될 예정이다.

비판의 목소리와 갈등
_가야사 복원 사업은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숨겨진 가야의 이야기를 찾는다는 건설적 사업이지만 비판과 불만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문화재청과 지자체가 갈등 구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막대한 사업비를 요구하며 연구와 조사보다는 관광자원화와 무분별한 보여주기 식 개발을 하려는 지자체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지자체는 대통령의 지시 이후 지금까지 문화재청이 한 것이 무엇이 있냐며 문화재청의 무능력함을 지적한다.
_ 큰 규모의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인 만큼 이에 대한 걱정과 우려도 크다. 기억해야 할 점은 사업의 핵심이 관광 자원화나 보여주기 식 개발이 아닌 학술‧조사‧연구라는 것이다. 역사 왜곡에 맞서 우리 고대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의도만큼 좋은 사업, 올바른 개발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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