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가장 아름다운 삶은 베풀고, 베푸는 삶이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가장 아름다운 삶은 베풀고, 베푸는 삶이다!
  • 김남석 기자
  • 승인 2018.03.12 15: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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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IT공학부 류길수 교수님

 

 

 

 

 

 

 

 

 

 

 

 

 

 

 

 

 

 

 

 

 

 

이름에 수()가 들어갔기 때문에

 

_과거의 해양대학에 들어온 사람들은 공부는 잘했지만, 집안이 어려운 사람이 많았다. 사실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우리대학에 대해서 잘 몰랐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까지는 서울대학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형이 직장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대학에 가도 나를 밀어줄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장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여러 생각을 하며 당시 항공대학교나 사관학교 등의 특수대학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군대에 갔던 형이 휴가를 나와서 돈이 적게 들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대학으로 해양대학교를 추천해 주었다.

_그때 기왕 멀리 학교를 갈 거면 가장 먼 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름에 수() 자가 들어가니깐 물가로 가면 잘 될 것이라는 생각에 해양대학교를 선택했다. 당시 해양대학교는 항해과와 기관과가 있었는데, 기관과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수학과 과학은 잘 했는데, 영어에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퇴서를 품 안에 넣고 다녔던 학창시절

_사실 학교생활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학교에 다니던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장학금을 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1학년 때는 성적장학금을 받고 주말에는 근로장학생으로 일을 해서 장학금을 받았다. 그런데, 2학년 때 문제가 발생했다. 해양대학보사의 2학년들과 4학년 사이에 마찰이 있었는데, 이것이 전체 2학년 대 4학년의 마찰로 번졌다. 당시에는 2학년이 4학년에게 대항하는 것은 불순한 행동으로 여겼다. 그래서 당시 해양대학교 학장이 2학년 전체에 대한 모든 장학금을 취소시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억울했지만, 당시 학장의 권한은 엄청났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 같다. 그때 다른 생활적인 면에서도 일이 잘 안 풀리는 등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실제로 자퇴서를 작성했다. 그때 동기 한 명이 다시 대학을 가더라도 해양대학교보다 좋은 대학을 가기는 힘들다면서 누차 말렸었는데, 그 덕분에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2학년 때는 한동안 자퇴서를 품 안에 넣고 다녔다.

 

 

실습선 조교부터 교수까지, 삶의 무대가 된 해양대학교

_당시 졸업생 200명 중 50명은 군대에 가고 2명 정도의 학생들은 학교실습선을, 나머지 학생들은 선원이 됐었다. 그때만 해도 육상근무자와 해상근무자의 봉급 차이는 5~10배 가까이 차이가 났기 때문에 학생 대부분이 배를 타는 선택을 했다. 그런데 졸업을 할 당시 구 한바다호가 처음 들어오면서 학교실습선에 4명이 승선을 해야 했고, 기관과 1명이 비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바다호의 기관장과 면식이 있던 터라 학교실습선에 지명되었고, 거부하면 군대를 보내버린다는 대학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바다호에 2년 동안 조교로 승선하게 되었다. 이때 대학원을 다니면서 제어 분야에서 석사학위를 땄다.

_실습선 생활을 끝내고 4년 동안 배를 탔다. 당시에는 7년째 배를 타면 선기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관장을 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에 학교에서 일등기관사를 모집했고, 아내의 설득에 결국 다시 학교로 들어오게 되었다. 학교에 다시 들어와서 보니 전공했던 제어학 관련해서 많은 학생이 있었다. 그래서 전공에 대해 다시 고민하던 중에 과거 석사 공부를 했던 교수님과 면담을 했고, 새로운 학문을 해보라는 조언에 해서 마침 보급이 되던 컴퓨터와 관련된 학문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때 일본 국비 장학생에 선발이 되어 일본에 가서 컴퓨터를 공부하게 되었다. 결국, 일본에서 5년간 공부하면서 인공지능과 관련한 박사학위를 따고 학교로 다시 돌아와 교수가 되었다.

 

 

교수로서 바라본 대학의 격동의 시기

_인공지능을 공부하고 학교에 온 것은 1988년이었다. 당시 대학가의 화두는 양적 팽창이었는데, 보수적이었던 우리 대학은 이에 대응이 느렸다. 하지만 부경대와 같은 주변 대학의 팽창에 위기의식을 느낀 우리 대학은 결국 학과를 많이 늘리기로 하고 매년 1~3개의 학과를 늘렸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학교에 와서 한 일은 전자통신공학과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 이후에도 공과대학의 여러 학과를 만들고 합치는 일을 했다. 지금 보면 당시 학교가 교육적 측면에서 갈팡질팡했고, 결과적으로 힘들었을 학생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_한편 학교에서 많은 역할을 맡기도 했다. 우리 대학의 울산 이전문제로 학교에 잡음이 있을 때 기획처장을 맡았다. 당시 기획처장의 주된 역할은 교육부의 평가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때 교육부의 우리 대학 평가에서 전국 3위를 해서 학교에 플랜카드도 걸고 학교 분위기도 좋아졌던 기억이 있다. 기획처장을 그만둔 이후에는 도서관장을 맡아서 도서관의 디지털화에 힘썼고, 나중에는 대학원장을 맡기도 했다.

 

 

GIVE & GIVE

_먼저 학생들이 젊을 때 열정을 가지고 노력을 하면서 살면 좋겠다. 젊어서 1년 고생이 늙어서 10년 고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고생을 하면 분명 나이가 들어서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고, 반면 지금 편안하게 살면 나중에 가서는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_그리고 세상을 살면서 가장 아름답게 사는 것은 남에게 베풀고 봉사를 하면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GIVE&TAKE라고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살다보면 항상 주었을 때 받을 수는 없다. 그럴때마다 그러한 어긋남을 이겨내는 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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