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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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경인 기자
  • 승인 2018.06.04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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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갑을관계, 반복되는 갑질

_‘갑질’은 갑을관계에서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단어이다. 이는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 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신조어로 2013년 이후 인터넷에 등장했다. 갑이 을에게 가하는 부당한 행위는 하나의 단어로 만들어질 만큼 최근 이미 일상이 되었다.

수면 위로 드러난 갑의 횡포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갑질에 대해 시위 중인 인하대총학생회동문협의회 (시사인천 제공)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갑질에 대해 시위 중인 인하대총학생회동문협의회 (시사인천 제공)

_사회적으로 권위 있는 갑의 횡포는 2013년 ‘포스코 임원 기내 승무원 폭행 사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포스코에너지의 상무이사 왕희성 씨가 책의 모서리로 승무원의 눈두덩이를 때렸 크게 논란이 된 사건이다. 이후 사회에서 쉬쉬 되어오던 갑질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_그 후에도 남양유업이 유통업 대리점 상품을 강매해 불매운동이 일어났고, 대한항공 조현아, 조현민 상무가 갑질 사건으로 직위를 내려놓는 등 갑질은 우리 사회에서 우후죽순 일어났다. 이는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으며, 다시 한번 갑질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우리도 피할 수 없다
_갑질을 기업과 권력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해 멀게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갑질은 이미 우리 주위에 만연하다. 그리고 대학사회도 갑의 횡포를 피할 수 없었다.
_최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사적 지시를 내리고 성희롱과 폭언을 한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기존 예상과 달리 징계위에서는 정직 3개월이 의결됐다. 이에 서울대학 학생들은 집단 자퇴서를 제출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처벌 수준이 경미 하고, 해당 교수가 복귀하면 문제를 제기한 학생들이 피해를 볼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_대학사회 내 갑질은 교수와 학생뿐만 아니라 학생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선배가 후배의 군기를 잡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실제 경남 창원의 한 대학교에서는 13학번 선배가 18학번 후배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고, 후배들을 대상으로 두발·복장 등에 제한을 둔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그 많던 ‘갑’은 어디로 갔을까?
_실제로 취업포털사이트(인크루트, 잡코리아) 설문조사에 의하면 직장인의 약 97%, 아르바이트생의 약 81%가 근무 중 ‘갑질’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을이 당한 갑질로는 ‘반말 등 인격적 무시’가 1위를 차지했고, ‘시도 때도 없이 업무 요청’, ‘업무를 벗어난 무리한 일 요구’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갑의 감정과 인격적 모독은 을의 근무의욕을 저하했고, 스트레스로 인해 을은 업무에 지장을 받았다.

▲을이 당한 갑질
▲을이 당한 갑질

_그러나 직장생활 중 본인이 ‘갑질’을 한 적이 있냐는 물음에는 약 33%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자가 없는 격이다. 다시 말해 갑은 자신의 권위와 강압적인 행동이 ‘갑질’임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갑의 심리
_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갑이 되어 갑질을 하고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캐나다 윌프리드 로리어대학 Hogeveen J 교수팀이 심리실험과 자기공명단층촬영(MRI)을 통해 뇌 활동을 측정한 결과, 권력을 가졌던 기억을 떠올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비교했을 때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_거울 뉴런이란 내가 어떤 일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보고 듣고만 있어도 직접 경험할 때와 같은 반응을 하는 뉴런으로, 타인의 의도를 파악하고 공감하게 한다. 따라서 거울 뉴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은 갑이 자신이 갑질을 할 때 당하고 있는 을의 고통을 보고도 죄책감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을의 심리, 을은 어떻게 재생산 되는가?
_하지만 갑의 요구와 행패가 명백한 갑질임을 알면서도 다수의 을은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다. 취업포털사이트 사람인에 따르면 설문응답자의 42.8%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어차피 해결이 안 될 것 같아서’가 66.7%로 1위를 차지했고, ‘괜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불이익이 있을 것 같아서’, 등이 차례로 그 뒤를 이었다. 우리 사회의 구조는 계속해서 또 다른 갑을관계를 양산하고 있다.

▲을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이유
▲을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이유

_안타깝게도 성과사회에서 살아가는 을의 눈에는 옆의 을이 동료라기보다는 경쟁자로 보일 뿐이다. 무한경쟁에 노출된 청년 세대에게는 오로지 갑에게 받는 평가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생존의 관건이다. 근본적으로 평가제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갑이 평가자가 된 것이 정당한지 등에 대해서 감히 묻지 못하는 것이다. 대신에 그저 각자도생하려 발버둥 치면서 갑의 평가를 기다리는 ‘을’의 입장에 쉽게 길들여진다. -갑의 횡포, 을의 일터(양정호, 2018) 中


_갑에게 평가받는 것이 일상이자 생존인 을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 의문을 품기보다는 대부분 그 상황을 당연히 여긴다. 그렇게 하청사회에서의 불평등은 계속되고, 갑과 을은 재생산된다. 실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공과대학 소속 이 모 학생은 “사장님이 최저시급도 챙겨주지 않는다”고 말하며 부당대우를 받는 현실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신고를 하거나 항의해야겠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는다”며 “어쩌면 나도 갑질과 을의 대우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을 전했다.

 

나는 과연 을이었을까?
_교수의 지도하에 공부하고, 아르바이트 하는 대학생들은 ‘을’의 입장이 되기 쉽다. 선배의 온갖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고, 교수의 심부름을 해야 한다. 점주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손님에게 아무 이유 없이 인격 모독을 당해도 단지 급여를 받기 위해 참는다.
_그런데 정말 우리는 ‘을’이기만 했을까? 선배의 무례한 장난에 기분 나빠하면서, 후배에게 똑같은 장난을 친 적은 없는가? 뒷 정리를 하지 않은 손님을 욕하면서, 귀찮다는 이유로 떨어뜨린 쓰레기를 줍지 않은 적이 있지 않나? 무리한 요구한 요구를 하는 교수님에 난감해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내 일을 떠넘긴 적은 없는가? 국제대학 소속 박 모 학생은 “나보다 학번이 높은 선배와 조별과제를 하게 되면 선배가 먼저 편한 포지션을 고르는 게 일반적이고, 속으로는 그런 선배를 욕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막상 나보다 학번이 낮은 사람과 조별과제를 할 때면 나도 똑같이 행동했던 것 같다”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공과대학 소속 강 모 학생은 “아르바이트를 할 때 퉁명스러운 말투로 부탁을 하는 손님의 말은 들어주기가 싫었다”며 일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하지만 나도 환불 요청을 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닥쳤을 때 짜증을 모두 표현했다”며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모르게 손님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갑질’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_‘진정으로 그 사람의 본래 인격을 시험해 보려거든 그 사람에게 권력을 쥐여주어 보라.’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긴 말이다. 을에게 인정받는 겸손한 갑이 이 시대의 진정한 ‘갑’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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