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지난 9월 열린 국무회의에서 부마민주항쟁 기념일 제정이 심의·의결됨에 따라 201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전개된 지 정확히 40년 만에 처음으로 정부 주관 아래 그 기념식이 개최되었다._ 이는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더불어 부마민주항쟁이 한국 현대사 4대 민주혁명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시민혁명에 대한 국가적,범국민적 공감을 이끌어 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것은 주권자인 시민들이라는 확실한 명제에 대해 이번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은 우리에게 보다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겨울 공화국’
_“한국정부가 억압적이라는 비판은 편견입니다. 한국에서는 한국 형편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야 합니다.”를 서두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72년 12월 ‘유신헌법’ 개헌을 공표하며 본격적인 겨울 공화국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후 ‘국회해산권’, ‘대법원장 임명권’, ‘의원 1/3 임명권’을 가진 초유의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며 실질적으로 삼권분립을 유명무실화시켰고 또한, 반공 프레임을 가장한 ‘긴급조치권’(헌법 정지권)으로 유신 독재 반대를 외치는 시민들을 폭력 탄압하여 공포 분위기로 사회를 거듭 옥죄었다.
_특히, 강압적으로 국민주권을 찬탈하기 위해 유신정권이 짓밟아온 모두는 너무나 참혹했다.
이에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던 부마민주항쟁 특성상 그 대상은 불가피하게 학생, 근로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 해당되었다.
당시 정부는 순수 학생들이 정부의 옳지 않음을 지적했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공산당 폭력혁명으로 조작하여 관련자 180여명을 모두 구속, 심지어 그 중 8명은 간첩의 죄목으로 사법처형으로 몰았다.
뿐만 아니라 장시간 근로와 저임금에 시달리던 ‘YH무역공장’ 여성 근로자들이 위장 휴업, 인원 감축 등 경영주의 부당한 대우에 있어 벌인 합법적 권리 요구 농성에 있어서도 공권력을 동원하여 폭력으로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 과정에서 당시 김경숙 근로자(여, 22)가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지며 갈등은 겉잡을 수 없이 치닫고 민주주의는 거듭 뒷걸음질 쳤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
_형식적으로나마 남아 있던 야당을 제명시키고 독재를 노골화 하는 정부의 모습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부산·마산 학생들의 “독재타도” 울부짖음을 시작으로 민주주의를 소생시키기 위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_당시 부산에서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부마민주항쟁연구소 정광민 이사장은(당시 부산대 경제학과 2학년) “겁은 났지만 청년으로서 당연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당시 자신이 쓴 ‘선언문’을 들고 인문관 306호실로 들어갔던 순간을 떠올렸다. 또한, 정 이사장은 “학교에 그냥 머물러 있기에는 그 열기가 엄청났다”며 “옳다는 것에 대한 자발적인 행동이 이어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을 통한 인터뷰에 의하면 마산은 이전 3·15의거의 여파로 인해 단시간에 분위기가 고조될 수 있었다. 최갑순(당시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3학년)씨는 “학교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며 “시위를 계획하는데 있어 모두가 국가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심정으로 뭉쳤다”고 상황을 술회하며 “나 같은 사람도 그러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한편, 열악한 근로환경을 개선하고 근로자에 대한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불꽃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당시 ‘동일방직’에서 근무했던 추송례 씨는 “12시간씩 주·야 교대로 일을 해야 겨우 보리 섞인 쌀 한 말을 살 수 있는 월급을 받았다”며 “공장에서 일하고 집에 오면 지쳐 자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성장에 중심을 둔 사회의 감추어진 이면을 드러냈다. 또, “거리로 모이는 사람의 수가 나날이 느는 것을 보고 변화의 용기를 냈다”고 덧붙였다.
‘끝나지 않은 부마의 상처’
_10월의 치열했던 거리 함성은 향후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민주주의의 염원을 꽃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 흘린 너무나도 많은 피와 곪음은 누가 알아주고 기억할 수 있을까.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조경석 팀장은 이번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에 열렬한 환영을 표하면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부분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고심 중이라고 말했다.
조 팀장은 “무엇보다 진실을 알리는 것과 무고한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관련 보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며 하지만 “사회적인 편견과 과거의 너무나 큰 상처로 인해 마음을 열지 않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고 말하며 “이에 우리가 더욱 성실하고 세밀히 신경 쓸 부분”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렇다면 국가적인 기념식이 이루어진 현 시점에서 범국가적 차원의 방안은 마련이 되었을까?
조 팀장은 “무엇보다 현 <부마항쟁보상법>이 명시한 민주화운동 피해 보상 적용 범위가 30일인 것에 대해 논의 중이다”며 “부마민주항쟁은 그 특성상 민주화운동의 기간이 10일에 불과해 실질적인 혜택을 받는 사람이 전무하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단 3일이라도 구금된 경우도 관련자로 보는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때문에 추가적으로 진상조사위원회 관계자는 “5·18민주화운동보상법과 같은 3일 구금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며 “관련 법률 개정을 위해 각 부처 의원들과 논의 중에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 나아감과 우산’
_민주주의는 국가가 추구하는 이상과 항상 동시에 놓인다. 하지만 국가는 스스로 행동할 수 없기에 이상을 결정하는 것은 국가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만일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방향을 그들이 추구할 경우,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선을 지향하는 시민들 가운데서도 강한 투쟁이 일어날 수 있다.
_그럼에도 홍콩은 현재 곤봉에 맞서 우산을 펼치는 것을 선택했다. 특정 리더나 단체가 없이 다양한 시민들이 모여서 이뤄가는 이번 시위는 주권자로서의 권리와 의무가 공동의 선을 향한 모두와의 하나 됨으로 나타난 모습이다. 그 모습은 ‘어떤 권력도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당연함이 부재했던 우리의 과거와 닮아 있어 우리가 앞으로 나아온 만큼 그들도 더불어 나아오는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