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민주주의를 외치지 않았다
함부로 민주주의를 외치지 않았다
  • 김찬수 기자
  • 승인 2019.12.09 15: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민항쟁의 시작, 부마민주항쟁의 40년

_지난 9월 열린 국무회의에서 부마민주항쟁 기념일 제정이 심의·의결됨에 따라 201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전개된 지 정확히 40년 만에 처음으로 정부 주관 아래 그 기념식이 개최되었다._ 이는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더불어 부마민주항쟁이 한국 현대사 4대 민주혁명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시민혁명에 대한 국가적,범국민적 공감을 이끌어 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것은 주권자인 시민들이라는 확실한 명제에 대해 이번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은 우리에게 보다 많은 것을 시사한다.

첫 정부 주관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첫 정부 주관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겨울 공화국

_“한국정부가 억압적이라는 비판은 편견입니다. 한국에서는 한국 형편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야 합니다.”를 서두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7212유신헌법개헌을 공표하며 본격적인 겨울 공화국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후 국회해산권’, ‘대법원장 임명권’, ‘의원 1/3 임명권을 가진 초유의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며 실질적으로 삼권분립을 유명무실화시켰고 또한, 반공 프레임을 가장한 긴급조치권’(헌법 정지권)으로 유신 독재 반대를 외치는 시민들을 폭력 탄압하여 공포 분위기로 사회를 거듭 옥죄었다.

_특히, 강압적으로 국민주권을 찬탈하기 위해 유신정권이 짓밟아온 모두는 너무나 참혹했다.

이에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던 부마민주항쟁 특성상 그 대상은 불가피하게 학생, 근로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 해당되었다.

당시 정부는 순수 학생들이 정부의 옳지 않음을 지적했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공산당 폭력혁명으로 조작하여 관련자 180여명을 모두 구속, 심지어 그 중 8명은 간첩의 죄목으로 사법처형으로 몰았다.

뿐만 아니라 장시간 근로와 저임금에 시달리던 ‘YH무역공장여성 근로자들이 위장 휴업, 인원 감축 등 경영주의 부당한 대우에 있어 벌인 합법적 권리 요구 농성에 있어서도 공권력을 동원하여 폭력으로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 과정에서 당시 김경숙 근로자(, 22)가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지며 갈등은 겉잡을 수 없이 치닫고 민주주의는 거듭 뒷걸음질 쳤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

_형식적으로나마 남아 있던 야당을 제명시키고 독재를 노골화 하는 정부의 모습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부산·마산 학생들의 독재타도울부짖음을 시작으로 민주주의를 소생시키기 위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_당시 부산에서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부마민주항쟁연구소 정광민 이사장은(당시 부산대 경제학과 2학년) “겁은 났지만 청년으로서 당연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당시 자신이 쓴 선언문을 들고 인문관 306호실로 들어갔던 순간을 떠올렸다. 또한, 정 이사장은 학교에 그냥 머물러 있기에는 그 열기가 엄청났다옳다는 것에 대한 자발적인 행동이 이어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을 통한 인터뷰에 의하면 마산은 이전 3·15의거의 여파로 인해 단시간에 분위기가 고조될 수 있었다. 최갑순(당시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3학년)씨는 학교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시위를 계획하는데 있어 모두가 국가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심정으로 뭉쳤다고 상황을 술회하며 나 같은 사람도 그러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한편, 열악한 근로환경을 개선하고 근로자에 대한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불꽃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당시 동일방직에서 근무했던 추송례 씨는 “12시간씩 주·야 교대로 일을 해야 겨우 보리 섞인 쌀 한 말을 살 수 있는 월급을 받았다공장에서 일하고 집에 오면 지쳐 자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성장에 중심을 둔 사회의 감추어진 이면을 드러냈다. , “거리로 모이는 사람의 수가 나날이 느는 것을 보고 변화의 용기를 냈다고 덧붙였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광복동 시위
부마민주항쟁 당시 광복동 시위

 

끝나지 않은 부마의 상처

_10월의 치열했던 거리 함성은 향후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민주주의의 염원을 꽃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 흘린 너무나도 많은 피와 곪음은 누가 알아주고 기억할 수 있을까.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조경석 팀장은 이번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에 열렬한 환영을 표하면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부분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고심 중이라고 말했다.

조 팀장은 무엇보다 진실을 알리는 것과 무고한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관련 보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며 하지만 사회적인 편견과 과거의 너무나 큰 상처로 인해 마음을 열지 않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고 말하며 이에 우리가 더욱 성실하고 세밀히 신경 쓸 부분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렇다면 국가적인 기념식이 이루어진 현 시점에서 범국가적 차원의 방안은 마련이 되었을까?

조 팀장은 무엇보다 현 <부마항쟁보상법>이 명시한 민주화운동 피해 보상 적용 범위가 30일인 것에 대해 논의 중이다부마민주항쟁은 그 특성상 민주화운동의 기간이 10일에 불과해 실질적인 혜택을 받는 사람이 전무하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단 3일이라도 구금된 경우도 관련자로 보는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때문에 추가적으로 진상조사위원회 관계자는 “5·18민주화운동보상법과 같은 3일 구금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관련 법률 개정을 위해 각 부처 의원들과 논의 중에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 나아감과 우산

_민주주의는 국가가 추구하는 이상과 항상 동시에 놓인다. 하지만 국가는 스스로 행동할 수 없기에 이상을 결정하는 것은 국가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만일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방향을 그들이 추구할 경우,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선을 지향하는 시민들 가운데서도 강한 투쟁이 일어날 수 있다.

_그럼에도 홍콩은 현재 곤봉에 맞서 우산을 펼치는 것을 선택했다. 특정 리더나 단체가 없이 다양한 시민들이 모여서 이뤄가는 이번 시위는 주권자로서의 권리와 의무가 공동의 선을 향한 모두와의 하나 됨으로 나타난 모습이다. 그 모습은 어떤 권력도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당연함이 부재했던 우리의 과거와 닮아 있어 우리가 앞으로 나아온 만큼 그들도 더불어 나아오는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2019 홍콩 시위
2019 홍콩 시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