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싶지만 잊히면 안 되는 일
잊고 싶지만 잊히면 안 되는 일
  • 김민창 기자
  • 승인 2021.11.19 2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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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정승원 학생 유가족 인터뷰

_본 기사는 유가족과의 대화를 최대한 왜곡 없이 담기 위해 대화체로 작성되는 문단이 있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본지와 유가족과의 인터뷰

_본지는 정승원 학생 (이하 정군) 유가족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약속장소는 태종대 앞 한 카페에서 만났다. 정군의 아버지만 오셨을 뿐, 어머니는 차마 발걸음을 움직이지 못하셨다. 아들이 사망한 이후 우리대학은 유가족에게 올 수 없는 곳이었다.

_정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고 나서 처음으로 우리대학에 왔다며, 오는 길에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며 잠긴 목소리로 눈시울을 붉혔다. 점차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기자 그리고 우리대학 학생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_정군의 아버지는 그날의 기억을 한순간도 잊지 못했다. 그는 사실은 우리 아들에게 이런 참사가 일어날 줄 몰랐다대학생 특히 해사대학 학생을 볼 때마다 남일 같지 않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족의 비극은 한순간

_오후 4시 내가 직장에 출근해 나가 있을 때,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처음 전화를 받고 그때부터 우리 애가 쓰러져 응급실에 있다고 소식을 받았다. 우리 아들은 그 과정 속 열 가지 중에서 한가지라도 맞았으면 살 수가 있었다. 우선 구조원부터 헬기까지 그 안에서의 응급처치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 이후 인도네시아에 있는 병원에서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오는데 피눈물이 흘렀다.

_이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하기 전에 이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혹시 부모님을 사고로 보낸다면 그 슬픔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정말 그 일도 참혹할 정도로 슬프다. 하지만 자식 잃은 부모님은 그 슬픔의 100배를 겪는다.

_이 슬픔은 세월이 지나면 잊혀질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겪어봐야지 알 수 있는 아픔이다. 아들의 사망 이후에 여러 행정 절차가 있었다. 이런 마음 아픈 기간을 다 보내고 나면 점차 무뎌질까 싶었다. 하지만 아니더라.

 

텅 빈 아들의 방

_보내고 처음으로 많이 울었던 게 바로 상선 안에 있던 승원이 짐 왔을 때다. 배는 계속 운항을 해야 하니 항해 중간 귀향지에서 챙겨 돌아왔다. 다음으로는 사망 신고할 때였다. 동사무소에 찾아가 행정 절차를 마치고 등본을 발급해보니 아들의 비고에 사망했다고 표시됐다.

_아들이 죽고 나서 그 상처는 나아질 때쯤마다 계속 우리 가족을 맴돌았다. 첫 번째 생일 때도 그랬다. 2월에 보내고 나서 어느새 아들의 생일인 915일이 찾아왔다. 생일을 준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고민을 계속했다. 결국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_아들이 생전 살아있을 때, 아파트 분양을 받았다. 원래 한 방에서 아들 두 명이 나눠 쓰느라 많이 고생했다. 그러니 분양받은 후 가족과 함께 모델하우스를 갔을 때, 아들 승원이가 먼저 한 이야기는 바로 이제 제 방 생기겠네요?’였다. 그래 이제 생긴다며 답했다. 이후 침대도 있나요?’, ‘당연하지, 침대도 놔 주지라며 담소와 함께 아들은 실습을 끝내고 새집에 들어갈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아들은 실습 이후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올해 5월에 와서야 분양받은 아파트에 입주했다.

_우리 첫째 아들 승원이와 마지막 사진이 여기 있다. 재작년 12월인가 포항에 여행을 가 4명 가족 다 같이 찍었고, 이게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몰랐다. 이제 하나가 빠졌다. 항상 뭐든지 4명이 같이 했는데 한 명이 비니깐 참 묘하다. 지금 내 휴대전화기 배경 화면에 있는 가족사진은 이제 4명이 아니라 3명이다.

_아들의 휴대전화기는 결국 해지했다. 그래서 아들의 프로필은 알 수 없음으로 표시된다. 하지만 아들과 나눈 그동안의 SNS 대화록은 그대로다. 지금도 대화방을 나가지 않고 아들 생각나면 꺼내서 본다. 나눈 대화를 보면 아들이 나에게 보내준 대학 생활 중 찍은 사진부터 내가 업무차에 한국해양대학교 앞을 지나가면서 시작된 담소까지 있다.

 

추모하는 자와 안 하는 자

_사측은 우리 아들을 보내고 나서 사죄를 했다. 그리고 대표이사가 전화로도 제 자식 일이라고 생각하며 남은 일들 진행하겠으니 편하게 계십시오라며 이야기했다. 그때 말 한마디 한마디가 참 고마웠다. 그리고 아들의 기일 날이 왔을 때, 절에 가보니 사측 직원들이 들렀었다. 지금도 선사 담당자와 전화를 한 번씩 한다. 하지만 자주는 안 한다. 그분들도 함께 통화할 때마다 승원이 생각으로 또다시 맘이 아프기 때문이다.

_아들 친구들인 학생도 아들 기일에 문자와 전화가 오고 지금도 한다. 여기 인터뷰를 하러 학교로 오면서 아들의 동기인 한 학생과 연락을 했다. 이 학생은 학교에서 장례를 치르고 있을 때 편지를 썼던 친구다.

_하지만 담당 교수는 달랐다. 선사 측 직원, 같은 대학 동기들마저 모두 아들의 기일 날을 추모했는데, 그는 자리에 없었다. 결국 최근 아침 출근 중 분을 못 이겨 우리 아들 담당 교수에게 전화로 따졌다.

 

부디 우리 아들 후배는 안전하길
_우리 아들이 다녔던 곳이기도 하고 항상 제복 입은 해사대 학생을 보면 실습이 걱정된다. 그래서 우리 아들이 떠났을 때, 조금이나마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선사에게 요청했다.

_먼저 실습 시작 전에 일정이 너무 급하게 변경되었다. 배는 이른 아침 인천에서 싱가포르로 출발하기로 했고 전날 급하게 아들은 출발했다. 또 본인 짐만 있으면 다행인데, 배 안에 있는 직원들이 요청한 물품들을 챙기느라 너무 힘들어했다.

_그리고 실습선에 도착해서는 2~3일 동안 적응 기간을 주었으면 좋겠다. 군대에서도 이등병에게는 여유를 주고 부대에 녹아드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또 실습생 처우개선과 함께, 동반 입대와 같이 원하는 동기와 실습을 보내게 하는 아이디어도 말했고 선사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떠나며

_정군의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우리대학 재학생 걱정을 해줬다. 인터뷰 막바지 그는 이런 참사가 더는 있지 않기를 바라며 학교와의 배상 소송 중, 일어났던 이야기는 기사에서 제외해 주길 요청했다. 이번 호에 이런 내용이 실린다면 재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학교에 대한 긍지마저 사라질까 걱정했던 것이다.

_한편 우리대학은 지난 8월 부산일보와 인터뷰에서 사망한 실습생의 개별 보상에 난색을 보였다. 기사에 따르면 사립대면 재단에서 지출하거나 하면 되는데, 국립대이다보니 도와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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