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특수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 한국해양대신문사
  • 승인 2022.05.13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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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전기정보공학부 21학번 편혜승

 자살, 고독사, 범죄현장에 있는 시신은 물론 저체온증으로 죽은 고양이의 사체를 수습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사체에서 흘러나온 유기물과 죽은 이가 남긴 냄새까지 없애 떠난 이의 흔적을 완전히 지운다. 뿐만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처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 쓰레기더미가 된 집안까지 말끔히 비워낸다. 그의 직업은 ‘특수 청소부’이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직업적 아이러니 속에서 먼저 떠난 이의 자리를 청소하며 그는 자신의 관념 속에 깊숙이 묻혀 있던 고독과 절망 같은 감정들을 현장에 투영한다. 그리고 살아있을 당시 그들의 삶이 어떠했을지를 그려보며 깨달은 ‘죽음의 의미’를 현장에서의 에피소드와 엮어 책에 담았다. 지난 해, 김완 작가의 저서, ‘죽은 자의 집 청소’를 읽었다. 책의 내용 중 필자의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있다. 사후 자신의 시신에서 나는 냄새가 이웃에게 피해를 줄 것에 대비하여 집안의 모든 구멍을 청테이프로 바르고. 착화탄에 불을 붙여 자살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부탄가스의 뚜껑과 캔, 포장 비닐을 분리해서 버렸다. 자신을 죽일 도구까지도 분리하여 버리는 공중도덕. “왜 이토록 타인을 배려하는 그녀가 정작 당신의 죽음의 문턱 앞에서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을까? 그녀의 곁엔 그녀와 같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특수 청소부라는 이름에 붙은 ‘특수’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누군가 홀로 죽어 뒤늦게 변사체로 발견되었을 때 그 시신을 수습하고 보금자리를 돌아보며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왜 ‘특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몫일까? 먼저 떠난 그들은 왜 홀로 죽게 되었으며, 어떤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관계의 한적함이 저들에게 외로움으로 정착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그 죽음을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런 많은 질문들을 ‘특수’라는 이름 하나에 일축한 채 외면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이름 안에 인간의 소외와 가난, 사회속에서 개인의 고립 등의 현실이 모두 눌러 담겨 감추어지는 것 같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제목의 책이 있다. 그 제목을 곱씹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 생활을 하는 모습이 어떠한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생각이나 살아가는 태도도 그 생활과 닮아가는 것 같다고. 그들의 삶이 생전 보다 조금 덜 가난하고 덜 고통스러웠다면 그들도 생(生)에 대해 조금 더 애틋할 수 있지 않았을까? 누군가 한 번 즈음 돌아봐 주었더라면 그래서 살아가는 모습이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변화했다면 살아있을 이유를 하나 즈음 더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작가 김완은 그의 저서에서, 사람이 죽고 오랫동안 방치된 집을 들여다보는 일은 누구라도 주저할 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신에게 익숙해진 일이라고 누구나 할 수 있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장을 목도하는 일 자체는 특수할 지 모르지만 혹 나의 곁에도 하루를 견디듯, 버티듯 살아가는 이웃이 있지는 않은 지 돌아보는 일 즈음은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얼마 전 TV 시사 프로그램에 청년들의 고독사 문제를 다룬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그 동안 청년들의 고독사 사건이 보도될 때 마다 20, 30대 취업 준비생들의 안타까운 죽음 정도로 다루는 선에서 그친 적이 많았다. 하지만 한창 인간관계를 넓히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에 시험 낙방과 계속된 이직으로 불안정한 삶이 계속되자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자신이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잃어간다고 한다. 우리는 고독사 문제를 독거 노인이나 기초생활 수급자들과 같이 이미 복지와 사회정책의 필요성이 잘 알려진 사회 취약계층의 문제로 생각해왔다. 때문에 그들 못지않게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의 현실을, 그들이 젊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해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복지대상이라고 여기고 싶은 사람들만 복지대상으로 여겨온 것이 청년들의 고독사를 막을 수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살기 좋은 사회는 외로움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외로울 때 외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이다. 가스나 전기세 미납 고지서와 독촉장 같이 고독사의 전조 현상으로 여길 만한 단서들이 있다면 공급 중단을 통보하기 전 그들이 생활고를 겪고 있는 이유를 알아보고,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차원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은 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고독하게 죽기 전에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를 먼저 살필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가까워지면서도 우리는 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린다. 하지만 삶을 삶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죽음이기에 죽음을 보면서 삶을 배운다고 말하는가 보다. 죽음은 나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고민하게 한다. 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고, 어떤 삶이 ‘잘 사는 삶’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한 번 즈음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간 우리는 수많은 뉴스와 책을 통해 각기 다른 사연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보았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도 있고 시한부 판정을 받고서도 어떻게 해서든 살고자 몸부림을 친 사람도 있다. 그들 모두 한 때 각자의 삶에서 소중한 것, 귀한 것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한 번 즈음 꼭 걷게 되는 삶의 굴곡 위에서 그들이 마음 속에 있는 그 귀한 것을 놓아버리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특수하지 않은 일’에는 무엇이 있을 지 고민해보았다. 비록 우리 사회가 자살과 고독사문제를 예방하기 위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죽음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고 문제의 돌파구를 고민하다 보면 언젠가는 외로울 때 외롭다고 말할 수 있고, 얼마든지 제도적 심리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탄탄한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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