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KMOU 문학공모전 [바다를 담은 이야기] 수필 대상 조아현
2022 KMOU 문학공모전 [바다를 담은 이야기] 수필 대상 조아현
  • 정예원
  • 승인 2023.01.16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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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왜 거울이 아닌가

동아시아학과 조아현

 

꼭 누군가에게 뺨을 얻어맞은 것처럼 표정이 저절로 일그러진다. 눈 밑이 바르르 떨릴 정도 째려보는 것도,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가는 것도 얼마나 오래인지. 하지만 이런 내 행동은 그에게 아무런 타격을 줄 수 없었다. 흉포하게 날뛰는 짐승들마저 기어이 살점 채로 찢어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핏발 선 눈을 한 소녀의 자격지심은 휘몰아치는 파도 소리 하나에 맥없이 쓸려 내려가 사라지고 만다.

되돌아간 물줄기는 환하다 못해 하얗게 타고 있는 태양을 품에 안고 있는 바다로 돌아가, 빛의 파편을 사방으로 뿜어낸다. 나는 도저히 그에게 한없이 무색한-흔해 빠진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사실은 너를, 그 누구도 손 쓸 수 없는 광활한 해양이라 인정하기 싫었다. 내가 이렇게 네 앞에 두 눈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그러나 그들은 꼭 내가 있는지도 모르는 마냥 늘 푸르고 하얀 모습이었다.

나는 둥그스름한 자갈을 쥔 오른손에 힘을 꽉 주었다. 무수한 시간 동안 차가운 파도에 쓸려 깎인 그것이었으나 아직은 완전히 쪼개지지 않아 내 손을 꽉 채우는 묵직한 흉기였다. 내 가슴이 그들이 뱉은 짠 가래침에 흠뻑 젖을 정도로 잔뜩 들고 왔던 돌멩이들이었지만, 모두 나를 떠나 이것 하나뿐이었다. 꽉 쥔 손을 들어, 눈앞에 그것을 가져왔다. 뚝뚝 떨어지던 그들의 타액은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증발하여 하얀 알갱이만을 만들고는 미련 없이 하늘로 향했다. 내 손을 쭈글쭈글하게 만드는 가루는 햇빛을 부숴 흩뿌리며 만든 그의 빛의 조각과는 퍽 다른 것이었다.

서서히 눈의 초점이 사라진다. 일렁이는 수면에 하늘을 그릴 수 있는 바다와 같은 눈동자가 아니었다. 흐려지는 눈빛은 곧 끝이 단단한 돌멩이에서 하얀 가루가 묻어있는 통통한 손바닥으로 향한다. 끊어진 폴리스 라인으로 원초적인 충동이 비집고 들어온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것처럼 세상이 탁-하고 밝아진다.

혀를 내밀어 그것을 핥아볼까.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온전해질 수 없었다. 입을 열기도 전,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나의 세상을 찢어놓는다. 찢긴 눈앞에는 이내 현실이 자리한다. 눈을 느리게 깜박인 나는 곧 그것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실소를 내뱉으며 손을 내렸다. 거역할 수 없는 콧대 높은 탐욕이 다른 것도 아니고 내 몸뚱이를 휘감다니. 어처구니없었다. 내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흐릿한 수평선을 만들어내는 바다를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초점 없는 눈 속에 다소 피곤한 기색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이내 눈을 감았다. 검은 화면이었지만, 마치 통통배를 타고 있는 마냥,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세상이 휘청거린다. 그러나 직선의 대지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곡선의 춤사위이었기에, 그저 가볍게 침을 한 번 삼킬 뿐이다. 나는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끝없는 심연의 화면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그 화면 너머에는 그를 처음 봤던 때가 펼쳐지고 있었다.

흥미 없던 인간의 삶 속에 처음 가슴 속이 휘몰아치던 그때, 소녀는 확신했었다. 동경(憧憬)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바로 그가 아닐까 하고.

 

 

이 길이 안 막히고 빨라서…….”

 

미안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했다. 분명 아무 말 없이 내가 창문만 보고 있으니 괜히 하는 말일 것이다. 그 마음씨를 너무나 잘 알지만, 애석하게도 조용한 분위기를 바꿔보자 내뱉은 택시 기사의 말은 창밖으로 고정한 나의 시선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학교로 가는 길, 빠듯한 시간에 급히 잡은 택시였다. 조수석 문을 연 나는 안전띠를 맨 뒤 학교로 가달라고 말했다. 영도 다리를 건너는 택시 안. 2시까지 갈 수 있겠지라는 나의 혼잣말을 들은 것인지, 택시 기사는 차가 꽉 막히는 공장지대를 한 번 쓱 보더니, 핸들을 꺾어 꽤 굴곡이 있는 오르막길로 향했다. 처음 가는 길이었다. 바쁜 건 둘째 쳐도 혹시 택시비를 덤터기 쓰는 건 아닐까. 나는 눈알만 왼쪽으로 돌려 흘깃 계기판을 한 번 보았다. 의심의 눈초리가 숨 쉬는 택시 안, 그러나 이런 내 꼴이 우습게도 택시 안은 너무나 결백했다. 이내 의심을 접은 나는 머쓱한 마음을 뒤로한 채 운전사인 것처럼 앞 유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명도 낮은 색색의 간판이 자리한 작은 가게들을 양옆에 낀 차들이 네 발로 쌩쌩 지나간다. 오르막이라 힘들 텐데, 체력도 좋지. 오른쪽에 있는 인도에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지팡이 하나와 함께 길을 걷고 계셨다. 몇 분은 음료수를 마시기도 하셨다. 그 평안한 광경에 바빴던 내 마음이 점차 고요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이 서 있는 버스 정류장이 저 멀리 보였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흐릿한 글자를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차였으나, 글자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흰여울문화마을’. 여태 이 길을 모르고 있었다니. 아무튼 흰여울 길을 통해 학교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 사는 집들은 처음 방문한 손님에게 선보이는 색다른 독립 영화였다.

초록빛의 나무들을 얼마나 지나쳤을까, 굽이친 길 너머, 무엇인가가 반짝인다. 그러나 여태껏 와는 뭔가 다르다. 아니, 세상이 반짝인다. 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옆 유리로 고개를 꺾었다.

바다다. 얇은 유리막 사이로 펼쳐진 것은, 거대한 하늘을 가득 담은 하얀 빛의 바다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보이는 푸른 해양의 향연에 내 입이 끝도 없이 벌어진다. 그러나 입을 다물 새도 없었다. 안경에 묻은 먼지를 닦을 시간도 없다. 바쁘게 달려가고 있는 택시 안에서,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푸른 바다를 이 두 눈으로 넘치게 담아야 했다.

숨이 턱 막혀왔다. 거대한 바다에 내 몸이 짓눌린 것 같았다. 지금껏 한 번도 바닷속에 잠겨본 적이 없었지만, 저 광활한 바다가 내 위에 올라탄다면 필시 나는 몸이 짓눌러 죽어버렸을 것이다. 거대한 크기와 웅장한 기백에 몸을 떨 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내게 위협적이고 싶지 않아 했다. 오히려 그들은 마치 수면 위에서 요리하는 것처럼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새하얀 태양을 담기 위해 숨을 참고 있었다. 혹여나 일렁이는 파도에 그릇이 엎어져 그 모두가 보이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할 법하였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이내 유연하게 몸을 멈춘다. 멈춘 그들의 위가 점점 밝아왔다. 내 눈동자는 그런 그들의 자태에서 점차 하늘을 향해 굴러갔다.

하늘에서 빛다발이 내려온다. 그리고 그 다발은 축복처럼 그들의 고운 몸에 내려앉았고, 이내 모습을 돌변한 바다의 거대한 무게에 사방으로 얻어맞더니 조각조각 부서졌다. 나는 그 찬란하고도 잔인한 폭력의 현장을 그저 눈을 크게 뜬 채로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깨질지언정 그에게 달려가는 것을, 햇빛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한 아름 달려왔던 빛무리는 숨을 참은 바다 위로 다시 내려앉았고, 마침내 다이아몬드 더스트로 다시 태어났다. 나와 바다와 세상은 여태껏 그것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눈부심이 이제는 폐가 아닌 나의 눈 속으로 밀려온다. 정신이 멍해진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고개도 저었다. 그들을 놓칠 새랴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난 그제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며 쏟아낸, 하얀 눈물이 고새 만연한 푸른 바다 위를, 수많은 어선이 유유자적하게 나아가고 있음을 말이다. 그 모습에 혼을 뺏기지 않은 자는 이 세상에 없으리라.

얼마 뒤, 나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선명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한 척의 배와 그림자였다. 검게 그을린 수면의 자국을 바라본 나는 알 수 있었다. 필시 저 선박 안에는 인간과 모터의 쉴 수 없는 노동이 맞부닥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그 무수한 행동들은 바다를 향한 붓촉이 될 것이고, 결국 해양이라는 푸른 그림을 완성할 것이다. 이 대지의 끝자락을 향해 질주하는 나와 마주한 거대한 바다는 그 위에 있는 하얀 태양을 포함한 수많은 빛을 반사한다. 태양과 바다의 유기적인 구성이 내 가슴 깊숙하게 자리 잡아,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지금껏 가만히 앉아있었던 나의 가슴이 들끓기 시작한다.

반드시 바다로 향해야 했다. 아니 적어도, 나는 저 부서진 햇빛으로 손을 뻗어 이 손바닥을 빛으로 가득 물들여야 했다. 붙잡지 못한다면 그 빛을 머금은 바다로 뛰어들어야 한다. 아름다움을 넘은 미려한 광경을 반사하는 마치 거울 같은 바다라면, 그 바다에 뛰어들어도, 내 온몸에 거울 조각이 박혀도. 박힌 조각에 살이 뚫려 고통에 몸부림치며 피를 토해 죽는다 해도! 난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동경하고 싶었다. 그를 동경해야 한다. 그를 동경해야 했었다. 그를 나의 연인으로 맞이해야 했고 스승으로 삼아야 했다. 그래, 그렇게 살았어야 했다.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는 차 안, 무모함이 가슴 속에 차오르는 승객이 있었다는 것을, 아마 그 택시 기사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나는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기억 너머에 펼쳐져 있었던 푸른 세상은 이제 내 앞에 없었다. 아름다움을 반사하는 바다, 나의 삶의 이유였던 그는 이제 나의 기억 속에 마지막 생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 시절 동경하던 바다를 떠나보내는 것은 잠깐의 아쉬움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해양의 수평선도 적적한 나의 기분처럼 마냥 흐리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이내 훌훌 털어낸다. 내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한층 더 가벼워진 두 팔을 쭉 펴 기지개를 켰다. 눈을 감기 전까지 내 손에 들려있었던 돌멩이는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훨씬 가벼워진 몸에 시원한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나는 돌멩이가 날아갔을 바다 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나 나의 몸부림이 그를 깨뜨리진 않았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에서였다. 하지만, 세상은 냉정했다. 역시나 바다는 깨지지 않았다. 금이 가지도 않았다.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결국 나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투명한 산소마저 녹여내고 세상의 반딧불마저 사랑했던 그, 하늘이며 땅이며 온 우주의 아름다움을 껴안고 부시고 반사할 것 같았던 바다 너를, 나는 거울이라고 착각했었다.

 

그것을 끝으로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내 아래에는 역시나 하얀 거품이 뒤섞인 파도가 발을 적시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 조각이 아닌 그저 굴러갔다 돌아오는 축축한 액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헛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크게 숨을 마시자 크게 부푼 폐로 바다 특유의 짠 내가 들어온다. 하늘에는 갈매기가 여럿 날아다니며 둥근 궤도를 만들며 날고 있었다. 평생을 그렇게 돌 것 같던 새들은 이따금 아래로 내려간다. 그들도 나처럼 바다가 부숴놓은 빛 조각을 입에 머금고 싶어서 내려가나 보다. , 이런 나의 처연한 마음은 새들은 모르겠지. 내 마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새들은 유유자적하게 다시 창공을 비행하러 올라왔다.

-. 온 힘을 다해 뿜어낸 숨이었으나 대지에 서 있는 나의 숨결은 바다가 지닌 마음 한편조차 채우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쓴웃음을 삼키지도, 분노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너를 해치려면 나 스스로가 흉기가 되어야 했다.

 

거대한 함선이 해양을 가로질러도 끄떡없던 바다였기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단단한 대지 위에 서 있기만 한 소녀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나는 한 발짝 앞으로 향했다. 발끝에서 시작된 축축함은 이제는 발목을 집어삼킨다. 고개를 들어 내가 나아가야 할 표시 없는 물길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아름다움이 반짝이던 바다는 어디 가고 나의 검은 그림자만 짙게 물들어있었다. 너무나 아름답기에 날카로울 것 같았던 바다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미끌미끌했다.

또 한 발짝, 또 한 발짝……. 부드럽게 나를 감싸던 바닷물은 이제 목 끝까지 차오른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목을 둘둘 감았던 목도리가 수면 위로 맥없이 뜨더니 이내 나를 떠나갔다. 돌멩이를 가득 안아 생겼던 가슴의 물 자국도 이제는 함빡 몰아치는 바다에 사라졌다. 이따금 파도에 얼굴을 맞아 이제는 온몸이 소금투성이였다. 물에 젖은 생쥐 꼴에 누군가의 다문 입술 사이로 웃음이 삐져나온다. 역시 그날의 무모함에 대한 비웃음인지, 아니면 차갑게 차오르는 현실을 피할 수 없기에 나오는 체념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반드시 기억해야 했다. 소녀는 자신이 떠나온 길을 돌아보아서는 안 됐다. 왜냐하면 그녀의 등 뒤에는 자신이 걸어갈 길에 물든 검은 먹물보다 더 짙고 긴 그림자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을 것이니까.

아무 전조도 없이. 나는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누구도 내가 바다에 빠진 것을 알지 못했다. 바다 위를 가르는 어선들도, 세상을 유람하는 여객선도. 그 누구도 자신들 밑에 인간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모를 것이다. , 가끔 누군가가 던진 낚싯바늘에 맥없이 건져질 수는 있겠다.

. 사실 처음부터 느낀 것이었지만, 아름다운 겉모습과는 달리 바닷물은 역시 너무나도 차가웠다. 얼마나 차가운지 이제 막 뛰어든 내 사지가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입김을 불어 얼어붙은 내 두 손을 잠깐 녹이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내 숨만 찰 뿐이었다. 냉혹하다 못해 참혹한 겨울 바다의 냉기는 겨우 숨이 붙어 있는 나의 척추를 타고 올라와 뇌를 강하게 내리친다. 덕분에 나는 차가운 바다에 정신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다행이었을까? 그러나 해류는 내게 너무 아찔했다. 애써 부릅뜬 눈이 점점 감겨왔다. 바다 아래 암석을 딛고 걸어가던 두 다리가 꼴사납게 버둥거린다. 애써 참아왔던 숨도 이젠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덜컥 마주한 두려움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둠이 짙은 수면 아래에서 눈물을 흘려봤자, 인어공주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자그마한 비련의 물거품만 될 뿐이었다.

막혀오는 숨에 결국 목구멍을 열고야 말았다. 매서운 바닷물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온몸으로 치고 들어왔다. 그 괴로움에 고개가 뒤로 꺾였다. 시체라도 둥둥 떠 누군가 건져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냉정하게도 몸은 점점 가라앉았다. 눈이 뒤집힐 지경까지 이르자, 내 눈앞에는 다시 그때처럼 하얀 섬광이 스쳐 지나간다.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이 괴로움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때, 차가운 무엇인가가 가슴에 박혔다. 차가운 냉기, 내지는 알싸한 바닷물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찌릿함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그것은 내 심장에 깊게 박혔다가 이내 몸을 뚫어버린다. 크게 뚫린 상처에 나의 뜨거운 혈액이 모조리 뿜어져 나와 주변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내 몸속에 있던 모든 것이 빠져나간 기분이다. 바다의 손을 잡고 나를 떠나간 선혈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내게 남은 것은 이제는 의미 없는 몸뚱이뿐이었다.

그러나 이상하다. 아프지 않다. 여전히 숨이 막혀 눈과 코가 매웠지만, 상처는 쓰라리지도 않았다. 마법 같은 상황에 나는 슬며시 올라가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아지랑이로 흘러나가는 건 나의 핏줄기가 아니라 일생을 기다려왔던 그리움이었다. 한때 내 속을 채웠던 나약함은 물거품이 되어 해양을 떠돈다. 이제는 빛줄기조차 닿지 않는 미지의 공간에서 나는 그에게 답할 수 있었다. 바다는 왜 거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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