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KMOU 문학공모전 [바다를 담은 이야기] 수필 최우수상 진서윤
2022 KMOU 문학공모전 [바다를 담은 이야기] 수필 최우수상 진서윤
  • 정예원
  • 승인 2023.01.16 22: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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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 닦음, 칠흑, 바다 저 편에 낙원이 있다

기관시스템공학부 진서윤

 

-렌즈 닦음-

나는 바다 너머 먼 곳을 망원경을 통해 또는 핸드폰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실제로는 광활하고 끝도 없이 넓어 보이는 것이 꼭 내 눈 안에 다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마찬가지로 창문을 통해 보는 것 또한 좋아한다. 이 세상을 간단하게 그리고 편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여행을 동경해왔던 나는 성인이 되고 많은 나라를 여행 다녔다. 물론 이 시작도 내가 세상을 간단하게 봐왔던 것으로 꿈꿔왔을 수도 있다. 다양한 나라를 가니 다양한 사건사고도 많았는데 인종차별은 고사하고 숙소를 사기당한 적도, 소매치기를 당해서 그 나라 경찰서를 갔던 적도 있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색안경을 끼지 않겠다는 나 역시 그 나라에 대한 불신이 스멀스멀 자리 잡고는 한다. 하지만 그 마음을 깨뜨릴 정도로 강력한 선()한 사람들도 만난다. 도시와 거리가 멀어 한국 음식을 반년이 가도록 못 먹어본 나에게 신라면을 선물해준 Naz, 마지막 떠나기 전 제대로 된 웨일스 식사를 해주겠다고 양고기와 그레이비소스를 준비한 Marylin, 한국에 가서도 잊지 말라고 그 지역의 예술가가 그린 그림과 은팔찌를 선물해준 Sophie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 나라를, 그들을 나쁜 눈으로만 쳐다보던 내가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사실, 편견이란 먼지와 같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화면 또한 먼지가 많이 낄수록 뿌옇게 될 수도, 안 보일 수도, 색이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충분히 렌즈를 닦음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그런 좋지 않은 일들을 당하고도 내가 여전히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렌즈 닦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나는 그래서 지금도 새로운 무언가를 마주할 때는 고사하고 익숙한 무언가를 마주할 때도 먼지 없는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

 

-칠흑-

가끔 어둠 속의 칠흑 같은 바다를 보면 두려움과 공포가 자리를 잡고는 한다. 하지만 실제로 바다는 칠흑 같지 않다. 여전히 그랬듯 투명함과 파란색 그 중간에 있을 뿐이다. 그럼 무엇이 칠흑 같을까. 그저 바다 옆의 하늘이 칠흑과 같다. 항상 가장 가까이 머물던 것의 색깔에 맞게 바다는 변화할 뿐이다. 밤이 되면 그에 걸맞은 검은색이 되고, 해가 뜰 때쯤엔 샛주황색이, 태풍이 부는 날에는 연분홍색이, 맑은 날엔 파란색이 된다.

 

만약 바다가 감정을 품는 물질이라면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하늘을 그는 친구로 생각하고 있을지, 늘 올려다보아야 하는 존경의 대상으로 보고 있을지 어쩌면 자신을 멋대로 변형시키는 괴롭힘의 가해자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바다라도, 그런 하늘이라도 놀랍게도 언젠가는 파란색이 된다. 상처를 받는 사람들도, 절망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도 어느 정도의 주황색 또는 검붉은색의 해 모양의 상처 딱지는 지니고 있다. 하지만 바다가 본래의 파란색이 되듯이 상처 딱지 역시 언젠가 뗐을 때 피부색이, 그저 몸의 많고 많은 한 부분이 되고 만다. 상처가 되었을 때는 그 부분이 내 몸에서 가장 아픈 부분,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부분이 되지만 상처가 나음과 동시에 이는 그냥 다수의 살에 섞여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상처는 중요한 것인가. 하지만 대부분 사람이 상처받는 것을 자초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감정은 중요한 것일까?

 

전에 학교 동기와 칠흑을 바라보며 감정의 중요성에 대해 짙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오만한 편이라서 당연히 이성만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이며 모든 것의 창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이성적이라서 꺼냈던 답변이 아니다. 나는 마음이 약해지자 제대로 된 판단을 못 내렸던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기 때문에 오히려 감정적이었기 때문에 꺼냈던 한마디였다. 감정적으로 되는 순간에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꺼낼 수 있던 말이었다. 내 말이 끝나고 그녀는 그녀다운 감정적인 표정을 하며 반박하였다. 모든 감정을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자만심이라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도 예측대로 흘러오지 않았는데 앞으로 더더욱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도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 수 없다고. 그 순간이 닥쳐야만 그때의 감정이 나타나고 그 감정은 나조차도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 학교에서 칠흑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핸드폰 조명을 켜거나 가로수 등 아래에서 칠흑을 바라보지만, 사실 혼자 있을 때는 더 칠흑으로 들어가 칠흑을 바라보고 싶다.

 

-바다 저 편에 낙원이 있다-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의 순간들>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바다 저 편에 낙원이 있다는 그의 확신은, 가령 그것이 환상이라고 해도 이 젊은이의 삶에 조그마한 위안이 될 것이다.”

 

이 구절을 보았을 때, 어떤 젊은이를 떠올렸는가? 무인도에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희망을 얻는 젊은이의 모습? 아니면 어촌 생활을 하며 부귀영화를 꿈꾸는 젊은이의 모습?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겠지만 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다에서 거세게 수영해가고 있는 젊은이를 떠올렸다. 거친 바다를 헤엄친다면 물론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낙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아닌 확신을 한다면 이런 고난은 그에게 기억에 남는 파도 조각조차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줄만 알던 시절, 나는 내가 겪은 고난만이 세계 제일인 줄 알았었다. 그래서 항상 같이 다니던 친구인 S 모 양. 그녀는 모든 스트레스를 가볍게 넘기는, 정말 인생의 시련이란 없는 친구로 나는 인식했었다. 나의 울음도 잘 받아주던 그녀에게 언젠가 궁금해져서 당신의 인생에서 힘들었던 때를 물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받은 그녀의 이야기는 나의 울음이 초라해질 정도였다. 우는 소리가 더 크다고 더 아픈 것이 아니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녀도 절대 가볍게, 쉽게 살아오지는 않았었다. 그녀는 나와 별다를 게 없었고 오로지 다른 점이라고는 하나였다. 나와 그녀는 바다를 향해 헤엄치고 있었지만 나는 낙원의 확신이 없었고 그녀는 있었다는 것.

 

만일 모든 사람이 바다 위에 떠 있고 거기서 갑자기 어떤 미친 사람이 한 방향을 가리키며 저기에 낙원이 있습니다!’ 한다면 따라갈 수 있을까? 그저 생각 없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며 그를 무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사실 생각 없는 사람이 아닌 확고한 결심을 가진 사람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 둘을 착각한다. 그 사람이 만약 낙원을 찾는다면 우리는 그제야 그를 선도자로 인정할 것이다. (또 다른 입장으로 생각해보면 찾기 전까지는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 반대로 내가 그 젊은이가 아닌 그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내 취급을 다들 인정하고 동조해주어 어쩌면 어깨를 으쓱대며 이 무리의 지도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끝은 바다에서 죽는 엔딩 또는 그 젊은이가 맞았고 내 의견이 틀렸다는 인정을 하는 수치뿐이다. 결국 목적과 욕망이 없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님을. 조심하는 사람은 실패를 안 할지도 모르지만, 실패가 두려워 시도하지 않는 그의 삶 자체는 실패라는 것을.

 

-렌즈 닦음 ()-

작성된 글들은 오로지 내 생각의 나열이며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영향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글을 토해내고 난 뒤 다시 투명한 정신으로 내 할 일을 마저 해야겠다. 렌즈를 다시 닦아 맑은 눈으로 다시 세상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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