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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 항쟁의 역사는 고개 숙이지 않는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2020. 09. 08 by 이은진

 2019917, 행정안전부는 국무회의에서 부마민주항쟁(1979. 10. 16.)을 기리고자 10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는 개정안을 심의·의결했다. 이로써 부마항쟁은 51번째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1016, 경남 창원시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해 우리에게 민주항쟁의 위대한 역사가 있는 한 어떤 권력도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부마민주항쟁을 우리 역사상 가장 길고 엄혹하고 끝이 보이지 않았던 유신독재를 무너뜨림으로써 민주주의의 새벽을 연 위대한 항쟁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텔레비전 방송에서도 부마민주항쟁을 다루었다. KBS1016일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및 40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1979, 부마를 방송했고, MBC‘MBC스페셜에서 172부작 부마항쟁 40주년 특집 1979’를 통해 대한민국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부마항쟁의 현대사적 가치를 재조명했다. 부마민주항쟁은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다른 민주화항쟁에 비해 비교적 주목받지 못했지만, 대한민국을 민주국가로 있게 한 현대사의 주요한 사건이다.

 

18년의 독재와 무너진 경제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왔고, 결국 1979년에 한계에 이르렀다. 1979년은백두진(白斗鎭)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과 함께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는 반정부 인사들에게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강압책으로 대응했고,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고조되어 유신 정국은 긴장을 더해갔다. 게다가 김영삼(金泳三)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로 결국 정국은 갈등으로 치달았다.

 더불어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위기와 결합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는 한국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고 갔고, 결국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19794월 긴축 등을 골자로 한 경제안정화정책을 정부는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게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부채질했다. 기업의 부도율은 사상 최고치로 치솟았고 가뜩이나 어려운 도시하층민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됐던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은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모순과 연관되어 있다. 1979년 당시 부산의 산업별 생산구조는 광공업 비중이 42.1%, 광공업취업구성비가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1979년에 들어서 부산지역 경제상황은 극도로 악화됐다. 부산지역 부도율은 전국의 2.4, 서울에 3배에 달했고, 수출증가율 역시 전국증가율인 18.4%에 훨씬 못 미치는 10.2%로 하락했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정부의 유신독재체제에 대한 반발과 민생을 괴롭히는 경제적 모순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학생·시민들의 반정부 민중항쟁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의 특징적인 사실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당시 여당인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부유층에 대한 시위대의 공공연한 공격,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부가세를 없애라”,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는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방송국에 대한 공격으로 볼 수 있다.

 

투쟁하는 대학생과 계엄령

 19791016일 아침 10시경,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민주선언문이란 이름의 유인물은 학원의 민주화, 언론자유, 인권보장에의 신념을 확인했다.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고 선언하였다.

 기세를 올린 학생들은 산발적으로 교문을 나가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학생들은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했다. 비슷한 시간에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시내로 나아갔고,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튿날 17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화되었다. 이날부터의 데모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했다. 오후까지 시위는 학생들에 의해 주도됐으나, 시민들이 합류한 야간 시위대는 3분 만에 5만여 명에 이르렀다. 시위대에는 화이트칼라, 공장노동자, 상인, 업소 종업원, 고교생들도 동참했다. 17일에 이르러서는 도시룸펜, 접객업소 노동자, 영세상인, 반실업상태 자유노동자, 무직자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학생과 시민들은 KBS부산방송국과 도청, 세무서, 파출소 등을 파괴했다. 이때 일부 경찰차량과 보도기관의 취재차량도 피해를 입었다.

 민주화운동은 18일경에 마산으로 확산됐다. 1,000여 명의 경남대학 학생들이 마산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하였고, 일부시민들이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저녁부터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었다. 시위대는 파출소·공화당사·방송국·신문사에 투석하여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수십 명의 청년들은 공화당사의 셔터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서류와 집기를 밖으로 내던졌고, 파출소로 뛰어 들어간 또 다른 청년들은 벽에 걸려 있던 박정희의 사진을 파손했다.

 시위는 19일에 더욱 치열해졌고 마산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날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산업전문대학, 그리고 일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다. 공장직공·점원·날품팔이 등 10대 내지 20대의 젊은이들이 시위에 앞장섰다. 이들의 행동은 격렬하여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했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

 부마민주항쟁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180시를 기해 포고문 제1호를 발표하고, 각 대학의 당분간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의 2시간 연장 등 8개항을 포고하였다. 계엄사령부는 1024일 군·검 합동반을 편성하여, 계엄시기 중 특별수사부를 설치하고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그 결과 132명을 검거하고 23명을 구속 처리했다.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1020일 정오를 기해, 정부는 경상남도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였다. 이와 함께 마산 지역 작전사령부는 마산일원에 군을 진주시켜 시청 등 정부기관과 언론기관 등 공공건물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 통행금지가 2시간 연장되었고, 경남대학과 경남산업전문대학은 무기한 휴교조처가 취해졌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 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시위대에게 강도 높은 진압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후 부마민주항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이 끝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김재규가 박정희를 총격하여 살해한 10·26 사건이 일어났고, 유신체제도 종언을 맞이했다.

 

피의 대가

 박정희 정부는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전시상황과 마찬가지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장한 군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이후 삼십여 년 간, 경찰과 정부는 진압과정에서 공식적인 사망자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2011부마민주항쟁 특별법제정을 위한 경남연대는 당시 사망자가 있었으며 정부가 그 죽음을 은폐하려 한 것을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보고서(2010)에는 당시 계엄군이 시민과 학생을 폭행하고, 연행과정에서도 인권침해가 다수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수사과정에서 구속영장 없이 불법으로 구금된 사례, 성추행과 성적 인신공격이 발생한 사실도 발견되었다.

 201364,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통해 부마민주항쟁 보상 조문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과 함께, 관련자와 그 유족에 대하여 국가가 명예를 회복시켜 주며 관련자와 그 유족에게 실질적인 보상을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해당 법률의 제21조 및 제22조가 정하는 보상대상은 그 범위가 다소 좁아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2019411, 헌법재판소는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21조 등 위헌확인에 대해 기각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반대의견인 서기석, 이석태 재판관은 심판대상조항은 관련자로 인정된 자라 하더라도 부마민주항쟁에 의한 구금일수가 30일 이상이 될 것 등의 일정한 요건을 추가적으로 갖춘 자에 한하여 보상금과 생활지원금을 지급하도록 한정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를 지급대상의 확대가 재정에 타격을 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엄격히 제한하는 것 역시 합리적인 이유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2016헌마418). 이 법률에 따르면 비상계엄 이전 불법구금을 당한 마산지역 연행자들은 7일 내지 12일 동안 구금당했기 때문에 보상 대상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보상 대상자를 가려내기 위한 진상규명에도 난제가 존재한다. 재판, 구금 등과 관련된 일반 공문서보존기간은 5년에서 10년이다. 부마민주항쟁이 있은 지로부터 이미 그 기간이 훨씬 지나서, 당시의 기록은 폐기되거나 소실된 자료가 많다. 하지만 지역신문과 대학교 언론사들의 기록, 당시의 기억을 가진 생존자들의 증언은 남아 있다. 맞물리는 지점을 찾아 모든 정황을 조합하면, 우리는 하나의 실체적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시위가 이어지는 동안, 시위대는 멀리 있는 독재자뿐 아니라 총을 든 군인들과 싸워야 했다. 제대로 된 사법절차를 밟지도 못했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특별법의 보완을 통해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들에게 적절한 수준의 보상을 하는 것만이 실질적인 위로와 감사의 뜻을 전할 수 있다. 그것이 이 법률의 당초 목적인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이라는 취지에도 부합한다.

 

 

 부마민주항쟁은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지역감정으로 인한 내란으로 인식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도 제2, 3의 군부독재가 나타났고, 그것을 바로잡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정치가 민주주의의 암흑기를 달리는 동안, 부마민주항쟁은 대중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1980년대에 일어난 민주화운동들과 다르게, 부마민주항쟁은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독재정권이 무너졌고 책임을 져야 할 박정희는 암살당해 분노와 원망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부가 그들이 저지른 불법행위를 적극적으로 은닉한 사실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대학생이 중심이 되어 시민들의 참여로 확대된 부마민주항쟁. 부산·경남 지역에서 일어난 반()유신·생존권 투쟁은 10·26 사건의 촉발제 역할을 했다. 아래에서부터 시작한 민주화운동은 그야말로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분노였다. 참된 주인의식으로 민주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애쓴 1979. 그로부터 기념적인 40년째인 2019년을 보내며, 당시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들께 깊이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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