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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가 녹아있는 영도 곳곳을 살펴본다.
영도 알쓸신잡
2020. 09. 08 by 심은정

영도다리 아래에서 만나자!”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은 연락할 방도가 없어 영도다리를 거점으로 서로의 만남을 기약했다. 가족들과 헤어진 사람들이 가족을 기다리던 일종의 랜드마크였다. 그러나 역사가 숨 쉬는 영도다리에는 6.25와 관련된 사건 이외에도 수많은 사연이 교차한다. 다리 주변에는 근대의 역사가 묻어나는 애환의 역사가 있다.

수리조선소 길 '부산포지도' 화면캡쳐
수리조선소 길 '부산포지도' 화면캡쳐

 

매일같이 깡깡소리가 들린다. 수리조선소 길

영도다리 하나 건넜을 뿐인데, ‘부산스럽지 않은풍경이 있다. 선박을 수리하는 수리조선소길이 바로 그 모습이다.

1910년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이 극심할 때, 항구를 낀 영도는 당시 일본에게 황금의 땅이었다. 일본인들이 눈독을 들였던 것은 조선사업이었다. 한반도의 물자는 철도와 배를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일본과 조선을 오가는 배가 직결했던 영도는 조선소를 짓기에 가장 요충지였다. 목선 조선소인 다나카 조선소가 세워지면서 영도에는 크고 작은 조선소와 수리 조선소가 생겨났다.

1937년 국내 최초 철강 조선소인 조선 중공업이 영도에 세워졌으니 영도는 조선사업의 시작점이자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127년 역사의 수리 조선소길 4km에는 아직도 선박 정비 업체들이 치열했던 그 시절을 이어가고 있다.

1910년 봉래산에서 바라본 영도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1910년 봉래산에서 바라본 영도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1887년에 목선 조선소가 일본인들을 위한 다나카 조선소로 바뀐다. 그 장소가 목선을 집중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영도라고 하면 일본인을 위해 배를 만들기 위한 조선소만 있는 것처럼 알려지게 된다.

대풍포(大風浦)마을에도 조선소가 많이 생겨났다. 대풍포는 바다에 바람이 일어 파도가 높을 때면 풍랑에 대피하기 좋은 포구라서 붙여진 지역이름이다. 지금도 이곳은 매일같이 작업이 한창인데, 크고 작은 각종 어선과 선박들이 가득 정박해 있고, 작업장엔 매캐한 쇠 냄새와 용접불꽃이 피어올라 과거 시끌벅적하게 번성했을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 배를 만드는 업체는 사라졌지만 선박 정비업체와 부품업체는 여전히 건재하다.

수리조선소 길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수리조선소 길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최전성기에 달했을 때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됐을 때이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면서 일본사람들이 모두 물러나고 그 시설들이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나라의 배를 건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나카 조선소는 목선에서 철선을 만드는 조선소로 바뀐다. 이 조선소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수를 하면서 대한조선공사, 나중에는 한진중공업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1930년 영도 모습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1930년 영도 모습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영도민의 생활사

조선소뿐만 아니라 영도에는 바다에 기대 또 다른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바로 어민들과 해녀들이 있는 어촌계이다. 섬 주민들답게 이들은 오래전부터 바다와 더불어 살아왔는데 귀가 좋지 않아도 계속해서 일을 했다고 한다.

영도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만큼 그들의 주거지였던 적산가옥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건어물 시장이 형성되어있는 골목에는 일본의 잔재가 남아있다. 적산가옥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환기창과 목재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건물들이 세워진지도 어느덧 100여년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적산가옥을 보고 있으면 그 동안의 세월이 느껴진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이 거주하기 편하도록 지은 집들을 모두 적산가옥이라 한다. 이 집들은 해방이 되면서 나라에서 불하를 하거나 판매를 하는 방법들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게 됐다.

환기창과 목재구조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환기창과 목재구조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부산 최초의 위안소

개항과 더불어 조선에 없던 유곽이 처음 들어온 곳 또한 부산이었다. 당시 부산의 중심지인 일본인 거류지(광복동 일대), 철도 종사자들이 많은 초량, 어업 관계자들이 많은 영도(대평동, 대교동)에서 유곽이 성업했다.

봉래동 일대에서는 오래된 적산가옥을 만나볼 수 있다. 한 때 이곳은 유곽이 들어섰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낡고 누추한 이곳엔 아픈 과거가 숨겨져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 부대는 영도에 많이 주둔했다. 특히 아카사카 부대 등이 부산에 주둔하게 되는데 그 부대들을 위한 위안소가 영도에 만들어진다. 해방이 된 이후에는 이 위안소가 조선소가 활기를 띠면서 한국 사람들을 위한 유흥지로 바뀌게 된다. 애초에 이 위안소에는 일본인 여자들이 주로 많았지만 해방이 되면서 한국 여자들로 채워져 홍등가를 이룬다.

1960년대 활성화 됐던 이곳은 1970년대 도시재개발이 진행되면서 없어지게 되었다.

세월 따라 이곳의 주인들은 바뀌었지만 아직도 골목 구석구석엔 그 시절의 흔적들을 그려볼 수 있게 하는 모습이 남아있다.

 

경질도자터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경질도자터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영도의 황금빛 시절, 도기생산

한편 영도에는 동양최대규모의 도기 생산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1917년 영도에 설립한 조선경질도자주식회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 공장이 있던 자리엔 지금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오래 거주한 주민들 기억 속에서만큼은 여전히 생생하다.

 

일본 경질도자주식회사는 일제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상품의 조선 점령을 위하여 선진화도니 공산품을 직접 생산하기 위해 영도에 설립한 도자기 회사로 해방 후 대한도기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은 담장 일부가 남아있을 뿐, 한적한 주택가로 변했지만 과거 이곳에서는 수많은 도자기가 쏟아져 나와 동남아 각지로 수출되었다고 한다.

 

대한도기는 1917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경질도기회사의 분공장의 성격으로 부산 영도에 들어서게 된다. 부산 영도에 들어서게 된 이유는 일단 영도가 해안지역이라서 원료 확보와 수출입에 용이한 지리적인 요건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조선의 값싼 노동력을 이요하기 위해서 영도에 자리 잡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 대한도기는 일본경질도기회사와 조선도기회사가 되는데 1930년 해외 수출을 통해 국내 최대 규모가 되었다.

조선경질주식회사의 부산안내도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조선경질주식회사의 부산안내도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조선도기회사는 주로 생활자기 위주로 도자기를 만들었다. 국민들의 식생활에 변화로 주로 양식기, 홈세트, 커피세트 등의 생활자기가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중 김은호, 변관식과 같은 도공들이 내려와 대한도기에 잠시 의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도자기에 직접 그림을 그려 이름을 호처럼 남겨서 구운 핸드페인팅 도자기가 많이 만들어졌고 현재 부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핸드페인팅 도자기/부산박물관 제공
핸드페인팅 도자기/부산박물관 제공

대한도기의 명성은 60년대까지이다. 이후 대한도기주식회사에서 일하던 기술자들은 밀양자기나 행남자기 쪽으로 많이 빠진다. 그곳에서 전사 기술자들도 많이 배출되어 우리나라 도자기 산업에 근간을 이루는 작가들이 많이 활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구마의 발상지, 조내기 마을

영도 청학동에는 조내기로라는 도로가 있는데 이 이름이 붙게 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이곳이 바로 고구마가 처음 나온 곳이기 때문이다.

 

고구마는 176310월 통신저사 조엄이 사행 도중 대마도 사스나에서 처 음 보고 구황작물로는 좋은 농작물로 생각되어 들여왔다. 조선에 전래한 고구마의 첫 시험 재배지가 영도이다.

조엄 선생은 옛날 동래 부사였는데 조선통신사로 갔다. 그때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무척 빈곤했는데 조엄 선생이 그곳에서 고구마를 먹고 내가 이 고구마를 먹어보니 정말 맛있어서 그 고구마를 부산에 가져가서 심어서 백성들과 나눠먹으면 좋겠다 싶어서 배로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열흘이 걸려 온 고구마를 심은 곳이 영도 청학동 일대이다.

1763년 일본으로 건너간 조엄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고구마를 들여오게 된다. 이 고구마가 영도 동삼동과 청학동 일대에서 시범 재배되어 이후 우리 식탁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조엄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조엄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지금도 조내기 고구마를 연구하는 곳이 있다. 지난해 마을기업으로 지정받은 이후 활발한 사업을 펼치고 있는 조내기 고구마 기업이 그곳이다. 조내기 고구마 기업은 고구마 생산을 위해 13000제곱미터의 경작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조내기 고구마의 특징은 알이 작고 겉은 빨갛게 생긴 것이 밤 맛이 난다고 한다. 이곳 고구마 재배 밭은 농약을 뿌리지 않고 썩은 고구마 줄기를 재활용해 퇴비로 사용한다고 한다. 건강한 고구마를 재배하는 조내기 고구마는 남한테 조그만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개인이 연구를 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준게 아닌가 싶다.

1946년 고구마 장사 모습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1946년 고구마 장사 모습 '부산포지도' 화면캡처
흰여울마을 / 영도구청 제공
흰여울마을 / 영도구청 제공

 

예술가의 혼을 띄우는 곳, 흰여울 마을

영도는 해안선을 따라 마을이 조성되어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동네마다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절영해안산책로 초입에는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이곳이 바로 흰여울 마을이다. 이곳은 2011년 산복도로 르네상스 대상지로 선정돼 마을 재생사업이 진행되었다. 마을 곳곳에 벽화가 그려지고, 폐가는 예술 작업장으로 변하면서 영도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 곳을 찾는 발걸음이 많아진 것은 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 변호인 덕분이기도 하다. 영화 속 배경이 된 곳이 바로 흰여울 문화마을이다.

흰여울 길 벽 글귀 / '부산 영도는 영화다!' 화면캡처
흰여울 길 벽 글귀 / '부산 영도는 영화다!' 화면캡처

 계단식 골목으로 이어진 이곳은 영도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는데 구청이 개조한 빈 집에 예술가들이 입주하면서 문화마을로 거듭났다. 마을 아래로 펼쳐지는 바다풍경이 작가들의 예술혼을 일깨울 정도로 빼어나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화가, 사진가, 도예가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모여들었다.

부산의 옛 모습을 간직한 흰여울 문화마을 옆으로 펼쳐진 부산바다는 눈을 뗄 수 어렵게 아름답다. 깎아지른 절벽 위 오래된 건물들을 캔버스로 그려진 아름다운 집들이 늘어서 있다.

영도다리를 지나 들어온 섬 안에는 아직도 과거의 모습들이 남아있다. 일제에 의한 아픈 과거도 있지만 근현대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던 다양한 흔적들도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영도는 우리나라 조선 산업의 근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곳이다. 흰여울 문화마을과 수국축제, 영도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크고 작은 산업들이 진행중이다. 작은 섬 영도는 이제 시대의 아픔을 넘어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흰여울 마을 옆 산책로 / 영도구청 제공
흰여울 마을 옆 산책로 / 영도구청 제공

 

참고문헌

이창근, 영도 워터프론트 장기발전 계획에 관한 연구-부산대교 및 영도대교 인근지역을 대상으로(2003),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정영민, 전통시장의 통합적 재생방안에 관한 연구(2015),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사진출처

영도구청 기획감사실 제공

부산포 지도’ 12회 화면 캡쳐

부산 영도는 영화다!’ 화면 캡쳐

 

도움자료

부산광역시 공식 유튜브 채널 영상 부산 영도는 영화다!’

티브 로드-부산포 지도 다큐멘터리 영상

11그곳엔 늘 영도다리가 있었다’,

12시대의 아픔을 넘어 다시 꾸는 꿈’,

13영도의 해안길을 따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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