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로 여기, <카페 헤세이티>
지금 바로 여기, <카페 헤세이티>
  • 박수지 객원기자
  • 승인 2013.02.25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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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인문학이 이루어지는 곳

 

헤로인(헤세이티에서 노니는 인간들)

실연당하고 채 3개월이 넘지 않은 사람 (3개월 넘은 놈은 이제 엄살떨지 말고 그냥 온나.) 계속 가출(출가)중인 사람. 걸어 다니는 사람(간판이 작아서 차 탄 놈, 뛰는 놈은 못 보니까.) ‘인디언’이라는 말에 피가 당기는 사람. 교수인데 수위아저씨 같은 사람. 기타로 오토바이 타는 사람. 산에서 낚시하는 사람. 산에 가서 안내려온 사람. 예수처럼 생겼는데 머리 깎은 사람. 탈영병. 자퇴생. 실업자. 백수. 비정규직 노동자. 도둑고양이. 먼저 온 바람. 어제 두고 간 책. 내일 올 희 망. 그리고 지금 바로 여기.

출입금지자

영업한다고 자존심을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런 놈들은 안와도 된다.

야구 보며 이길 것만 생각하는 놈. 안 듣고 저 할 말만 생각하는 놈. 뭐 좀 한다하는 냄새 풍기는 놈. 뭐 좀 한답시고 가만히만 있는 놈. 선거철에 만 바쁜 놈. 직업을 부러 드러내는 놈. 지입으로 예술가라고 말하는 놈. 공정무역 커피 맛에 길든 놈. 유기농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 대가리 꽉 찬 놈. 투기형 삽질꾼. 옆집 카페 주인. 집고양이. 내일 읽을 책. 이미 온 희망. 그리고 어제 내일 저기.

출처 : <카페 헤세이티>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서울생활을 했다. 당시 전국적 단위의 온라인 인문네트워크였던 <장미와 주판>(1997-2009)의 서울 공부모임과 부산 공부모임이 교류하면서 몇 번 부산을 오갔을 뿐이었다. 2010년 여름, 부 산의 인문학 공부 모임 <금시정>에서 ‘카페 헤세이티’를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운영자들의 손품, 발품이 십시일반으로 들어간 어렵게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그 공간이 문을 연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문을 닫기로 결정 했다는 소식이 잇따라 들려왔다. 안타까움이 앞섰다. 때마침 강원도 삼 척에 살면서 서울 공부모임을 같이했던 후배에게서 ‘우리가 헤세이티를 운영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없어지기는 쉽지만 다시 만들려면 쉽지 않을 공간이었다. 각각 서울과 삼척에 살던 둘은 그렇게 부산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카페 헤세이티>는 지난 해 4월 황경민, 김동균씨가 운영자가 되어 다시 문을 열게 된다. 인문공동체 <금시정>에서 운영했던 초기 헤세 이티의 모습은 공부모임 위주였다. 지난 해 다시 문을 연 후, 공부모임과 도 물론 연관이 있지만 카페라는 형식에 맞게 바꾸려 노력했다. 처음 오 는 사람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사실상 카페는 이윤이 있어야 지속가능해지는 것이고, 인문학공부와 는 모순되는 공간일 수 있습니다.”

대안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접점을 찾으려 여전히 노 력중이다.

황경민 운영자는 헤세이티에서 일주일에 한번 모임을 갖는 시인학교도 주관하고 있다. “문단에 등단한 사람만 시인인가요?” 권력화 된 단체들 을 조롱하는 의미로 이름도 <헤세이티 불법무단사설야매시인학교>다.

<해독계>라는 독서모임도 이루어지고 있다. “인문학하면 어려운 들뢰 즈니 라캉이니 지젝이니 하는 어려운 철학자들만 공부해야 하는 것은 아 닙니다.”

‘독을 풀다’는 의미의 해독(解毒)이자, ‘암호를 풀다’는 의미의 해독(解讀), 또 ‘해(헤)세이티 독서모임’을 줄인 말도 된다. ‘계’라는 것 역시 상부 상조의 ‘계’에서 따왔다. “단순한 지식욕 충족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서로 모자란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라는 설명이다.

박상현(경제학과·06)학우는 <해독계> 화요일 모임의 조장을 맡고 있 다. 재작년 한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헤세이티에서 하는 강연회 소식을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이제 3주차가 된 <해독계>는 운영자 분들이 골라놓은 책 목록 중 한권을 선정해 읽고, 각자 ‘글대궁’ (감명 받은 단락 혹은 문장)을 세 개씩 골라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들을 취합해서 의제를 결정 후 토론하는 형식이다.

“지난 화요일 모임에선 9명이 모였는데 의견차이나 관심분야가 너무 달라서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재밌었습니다. 다음 모임은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재작년 처음 헤세이티를 접했을 때에 비해 지금은 헤세이티의 명물인 입간판만큼이나 ‘패기 넘치는 공간’이 되었다고 한다. “학구적인 느낌보다 아마추어, 날것의 느낌이 강해 진 것 같아요. 강연회, 공부모임, 음악공연도 해서 정체성을 단정 지을 수 는 없지만 그만 큼 더 매력이 있는 셈이죠.”

앞으로를 묻자 그는 당분간 헤세이티를 다니면서 졸업 후 무엇을 할지 찾아봐야겠 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인문학은 어떻게 보면 쓸데없어요. 하지만 사람이 중요한 것 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요? 쓸데없는 것이지만 알아가다 보면 새로운 감 각을 확 트이게 해주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 사는데 큰 도움은 안 되 는 것 같지만...”

헤세이티는 페이스북에 올리는 그날의 입간판 사진으로도 유명하다. 온갖 물음표들 로 이루어진 거칠지만 세심한 ‘의문들’을 읽다보면 자연스 레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요’를 누르게 된다. “기존의 카페들이 입간판에 오늘 의 메뉴를 써놓듯이 헤세이티는 현실문 제에 대한 발언을 일상적으로 해 나가 는 겁니다.”

입간판은 다시 문을 연 뒤로 9개월 동 안 530여편(2월 15일기준)이 쓰여졌다. 노천칠판도 100여편이나 된다. 지난 대선 시점의 입간판은 민주주의와 선거제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악독한 지주와 덜 악독한 지주 중에 골라야만 하는 것인가요? 왜 지주제 자체를 의심해보진 않는 것일까요?”

상아탑은 자본주의가 강요한 경쟁에 매몰된 존재들이 거쳐 가는 곳이 되었다. 높은 실업률, IMF 이후 치솟은 비정규직화 등으로 형성된 불안 감은 자본의 요구에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는 계층을 만들었다. “대학생 에게 스펙을 쌓지 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해도 알고 당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변화나 전환 의 계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헤세이티가 지향하는 범주는 기본적으로 마이너리티, 아마추어, 비제 도권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시스템 속에서 배제된 혹은 소외될 가능 성이 있는 존재들을 품는다. “우리는 그저 판을 깔아주고 놀아보고 생 각해보라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짜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른 방식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너머’를 볼 수 있는 실험과 대안이 생긴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위기일까? 지난 해 한국 베스트셀러 1위는 마이클 센델의 ‘정 의란 무엇인가’가 차지했다. 황경민 운영자는 ‘상품화된 인문학’을 지적한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는 건 자본에 포획된 인문학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 람들이 밥벌이가 안 되니까 이때다 싶어 엄살 부린 것이라고 할 수 있어 요. 애초에 인문학이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을까요? 제도권과 시스템 밖 을 사유하면서 인간소외를 만연하게 하는 구조들을 깨뜨릴 수 있는 지점 을 궁리하는 것이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상품’을 팔 고 있는 세태는 외려 기존의 시스템, 자본의 권력을 밑 받치는 노릇밖 에 되지 못하는 겁니다.”

인터뷰 중 황경민 운영자는 ‘일장일단’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렇다. 만사가 일장일단이다. 일장일단이므로 한 가지에 매몰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가능성’은 열려있다. 헤세이티에서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것은 어떨까?

카페 헤세이티 Facebook : http://www.facebook.com/heseity

카페 헤세이티 블로그 : http://blog.naver.com/in_haecceity

박수지 객원기자

zorba928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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