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신념을 지키는 남자!
[안녕하세요 교수님!] 신념을 지키는 남자!
  • 이동건 기자
  • 승인 2013.10.11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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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경찰학과 이은방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 코너는 학우들의 가까이에 계시지만 학우들이 너무도 모르는 교수님들께서 살아오신 삶에 대해 알아 보는 코너입니다.

 

충청남도 청양 출생

 

 


한국해양대학교(학사),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공학사), Tokyo Institute Technology(공학박사)


현재  승선생활관 생활지도교수, OST-SCHOOL 해양안전재해대표교수
 해양경찰청 자체규제 심사위원장 및 자체평가위원
 해양환경안전학회 편집위원 및 상임이사

 

 

충청남도 청양에서 태어나 수원에서 학창생활을 보내고 우리대학 승선학과에 입학한 이후 영도를 떠난적이 없는 사람, 바다가 좋아 바다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자신의 호를 푸른 바다[靑(푸를 청) 洋(바다 양)]라 지은 사람.


청양 이은방 교수의 삶을 들어봤다.

 

Q. 안녕하세요. 교수님! 수원에서 학창생활을 보내셨는데 왜 우리대학에 진학하셨나요?


당시 내 주변의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남들과 똑같이 서울로 가면 그들과 비슷비슷한 재미없는 삶을 살게 될것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집에서 멀리 떨어져 생활하며 빨리 독립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그러다 우리대학의 승선학과를 알게됐다. 당시 나는 기숙사가 있다는 것과 우리대학에 진학 하면 다른 친구들과 달리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하얀 도화지에 내 마음대로 내 자신의 인생을 그릴 수 있을 것 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지원했다.

 

Q. 교수의 꿈은 언제 가지게 되셨나요?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기간에 즈음해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큰 충격이었고 내 인생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이제는 내가 나 자신을 책임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이후 내가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모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고, 그것을 알아낸 후에는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것이 즐거웠다. 이러한 고민에 끝에서 나는 우리대학의 교수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고작 1학년의 이러한 꿈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잘 없었지만 당시 나에겐 뚜렷한 목표였기에 자연스럽게 공부에 열중하게 되었다. 이후 4학년까지 줄곧 학생장을 맡아서 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고 과 수석으로 졸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Q. 대학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은?


일단 첫째로 아치타임 동아리를 만든 일이다. 영어에 관심이 많았는데 당시 우리대학에는 운동 동아리는 많았지만 영어 동아리는 거의 없었기에 영문지인 타임지를 함께 모여 읽고 해석하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30년이 된 지금에도 동아리가 이어져 오고 있고 학생들이 이따금씩 불러줘서 고맙다. 둘째로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낙마한 일이 기억에 남는다. 최초로 해사대학외의 타 학과와 함께 총학생회장을 뽑았던 때 였다. 학생장이었던 나는 막연히 내가 총학생회장이 될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결론은 내가 떨어지고 타학과의 학생이 총학생회장이 되었다. 이때 나는 리더쉽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최근에는 글로벌 리더쉽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이것을 알려주고 있다.

 

Q. 왜 졸업 후 승선학과가 아닌 우리대학 전자통신학과의 조교로 일하셨나요?


대학에 입학 할때와 같이 남들과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고 당시 항해 장비에 대해 알고 싶어 전자통신학과의 조교로 일했다. 1년간 조교로 일하며 이와 관련해 다양한 것을 알 수 있어 좋았던 것 같다.

 

Q. 1년간 조교로 일하신후에는 무엇을 하셨나요?


이후 1년간 상선(탱커)에서 해상근무를 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려면 학생들이 접하게 되는 해상근무에 대한 지식과 선박에 대한 실무를 겪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지금 공과대학 도덕희 교수님과 함께 생활했다. 배를 타고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 당시 필기했던 노트가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많은 도움이 돼 아직도 가지고 있다.

 

Q. 배에서 내리신후에는 실습선 교관을 하셨는데 악명이 높으셨다지요?


나는 엄한 교관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선박, 그리고 해양은 조그만 실수가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수 있는 환경이라고 생각했기에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내가 지도했던 학생들 중에는 현재 우리대학의 교수들도 있는데 지금 만나서 얘기를 들으면 조금 심했나 싶기도 하다.

 

Q. 이후 어떤 과정을 통해 우리대학의 교수가 되셨나요?


교관생활 중에도 교수의 꿈을 놓지 않았고 유학을 통해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여유롭지는 않았기에 학비를 지원해주는 일본 문무성 시험을 통해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 할때쯤 우리대학 교수 모집에 지원해 교수가 됐다. 또한 실습선 교관 생활 이후 나는 우리대학에 해상안전과 관련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교수가 된 후 미국 해안경비대 학교(USCG Academy)에 교환교수로 다녀 온 후 해양경찰학과를 신설하게 됐다.

 

Q. 승선생활관장을 하시는 동안 어떤 일을 하셨나요?


미국에서 교환교수로 있을 때 학생들이 선 후배간에 어려워하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창의적이고 자율적으로 생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에 승선생활관장으로서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했는데 먼저 식당에 갈때는 모자를 가지고 가지 않도록(당시에는 고학년만 가능) 하는 것이었고 다음은 경직된 분위기를 해소하기위해 평소 학내에서는 거수경례를 생략하고 서로 인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자를 놔두고 식당에 가게 하자 4학년 학생들이 내 연구실 문을 부셔서 항의를 했고, 거수경례의 경우 해사대학 학생 및 교직원 전체의 반대가 심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어서 3폭(폭력, 폭행, 폭언)안하기 운동을 벌였는데 4학년 학생이 술을 마시고 지도관을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제적을 해야 한다고 봐 당시 정학이었던 학칙을 변경하려고 했으나 구성원간 의견이 달라 정학처리만 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에 생활관장으로서 폭행을 용인 하는 태도를 보일수없어 승선생활관장을 그만 뒀다.

 

Q. 신념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데 힘들지 않으신가요?


나이가 들며 겁이 많아지고 학생과 세대 격차도 느낀다. 하지만 세대 격차는 소통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이를 위해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책과 대화를 통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신념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여태 신념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결과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과 같고 자신에게 떳떳함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Q. 강철체력으로 유명하신데 비결이 있다면?

 


나는 음주가무에 영 소질이 없다. 대신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운동을 하는데 내 차 트렁크만 봐도 축구공, 배드민턴채, 골프채 등이 있고 볼링, 당구도 즐긴다. 특히 축구와 골프를 좋아하는데 축구의 경우 우리대학 교수 축구회에서 활동하고 있고 일요일에는 우리대학 조기축구를 한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 밤이면 날씨예보를 보며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 한다. 운동을 즐기다 보니 체력이 좋아 3시간 연강도 거뜬한데 학생들이 먼저 쉬자고 할 때 아쉽다.

 

Q.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으신 말은?


도서관과 친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쇼핑가는 마음으로 주말마다 도서관에 들리는 데 꼭 책을 빌리지 않더라도 제목을 훓어 보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다양한 단어를 익힐 수 있다. 또한 학생들이 자신의 실패를 좌절로 보지 않고 인생의 영양분으로 여겼으면 좋겠다. 나도 실패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동기부여를 했을 때 더 좋은 결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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