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의 유감
새학기의 유감
  • 영어영문학과 홍옥숙 교수
  • 승인 2013.10.11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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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가 시작될 때는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이 교차한다.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개강울렁증’이다. 학생들만 방학이 끝났다고 한숨을 쉬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약간의 한가함과 나태함이 허용되던 방학이 끝나고 개강이 시시각각 다가오면,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논문과 개인적인 공부를 덮어두고 수업 준비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게으름으로 별 성과를 내지 못했던 방학을 뒤로 하고 새로운 한 학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건 선생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지도 모른다. 맘에 들지 않았던 방학은 내 뜻과는 상관없이 강제종료가 되고, ‘다시 시작’이라는 기회를 일 년에 두 번씩이나 선물 받는 셈이다.

그래서 새로운 학생들, 못 보던 사이에 여러 가지로 달라졌을 학생들을 만나게 될 거라는 설렘이 있다. 우리 학교보다 한 주 일찍 개강을 하는 덕분에 더 빨리 ‘개강울렁증’을 겪던 한 선생님이 첫 주에 수업을 하고는 “학생들 만나니까 너무 좋아요! 지금은 생생해졌어요.”라고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래, 역시 선생은 가르칠 때가 제일 좋아’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학생들 앞에 서면 피곤한 줄 모르고 (나만 혼자?) 신이 나니까 말이다.

이제 개강 첫 주에 학생들에게 느끼는 섭섭한 감정도 있다. 나는 첫 시간에 내 수업에 등록한 학생들을 전부 다 만났으면 좋겠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 특히 고학년 학생들은 첫 주에 수업하러 오는 걸 창피스럽게 여기는 모양이다. 불러도 대답 없는 학생들이 있다. 미국 유학 시절, 개강은 교내서점에 가서 교재를 준비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서둘러 가야 싼 값에 중고책도 구할 수 있었고, 저마다 한 바구니씩 책을 담아 계산을 기다리는 친구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개강을 실감했었다. 당연히 수업은 첫날부터 강의계획서대로 진도를 나갔다. 근데 한국에서는 개강 첫 주에 미국처럼 제대로 수업을 하는 건 꿈도 못 꾼다. 강의계획서를 출력해오는 친구는 좀 나은 편이고, 강의실에 들어온 대부분은 수첩 하나 달랑 펴놓고 앉아 교재 이름을 적을 준비만 하고 있다. 교재를 가져 오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교재를 미리 챙기는 것은 학생들의 몫이 아니던가? 개강 첫 시간을 외판원처럼 교재나 소개하면서 보내고 싶지 않아서, 일학년 교양영어 첫 수업이면 나는 십오 분의 시간을 주고 학생들을 바로 서점으로 보내 교재를 사오게 한다. 부모님께 등록금 신세를 졌으면 한 시간의 결강이라도 아까운 것임을 알려주고 싶어서이다. 전공수업에서 교재 준비가 안 되면 프린트라도 준비해서 강의 개요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복병을 만났다. 지난 학기에 새로 시작한 교양 강좌였다. 교양 강좌는 ‘학점 사냥’의 대상인지, 어렵다 싶으면 무조건 외면 받는 것을 나만 몰랐나보다. 사실 수강하는 학생이 많아도 힘들기 때문에 일부러 첫 시간부터 영어로 된 자료를 나누어주고 설명을 했더니 예상대로 수강생이 확 줄어버렸다. 다행이다 싶어 둘째 주에 수업을 가니 반 이상이 새로 신청을 한 학생들로 바뀌어 있다. 결국 똑 같은 오리엔테이션을 두 번이나 해야 했다. 멋모르고 내 강의를 자리가 비었다고 신청한 이 학생들은 수강정정의 기회도 놓쳐버리고 어쩔 수 없이 한 학기동안 내 수업을 견뎌내야 할 터이다. 과목에 관심이 있다면, 이왕 신청을 할 거라면, 강의계획서를 미리 챙겨보고 첫 주에 와서 강의도 들어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장학금 수혜율이 전국 최고 수준이라는 우리 학생들이니 등록금 낸 만큼만 공부하려는 걸까?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 나타나지 않는 학생을 이해해보려고도 하지만, 첫 주에 수업 안 해도 다음에 열심히 하면 되겠지 하면서 나도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진다. 그래도 첫 시간부터 강의에 출석해서 한 학기 동안 무얼 어떻게 공부할지 각오를 다지는 성실한 자세는 시험과 리포트로 받은 학점보다 더 중요하지 않을까? 성적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에게 성실해지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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