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골 함성
아치골 함성
  • 김기섭 기자
  • 승인 2013.12.02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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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퍼지(The Purge)’ 가 현대사회에 전하는 메세지

 최근에 개봉된 ‘The Purge’ 라는 영화는 2022년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데, ‘1년 중 단 하루 12시간 동안 모든 범죄를 허용한다’라는 법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같이 범죄가 허용되는 날을 퍼지 데이라고 하는데, 퍼지 데이의 주된 목적은 미국 시민들의 억압된 범죄 욕구를 12시간 동안 모두 분출시켜 평상시의 범죄율을 낮추기 위해서이다. 또한 사람들이 퍼지 데이에 대비하여 무기나 방범장치를 매매하게 하여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목적도 있다. 때문에 범죄율은 1%까지 하락하고 실업률 또한 최저를 기록한다.


 한 가정의 가장인 제임스는 ‘퍼지 데이’의 도입이후 최첨단 방범장치 판매로 높은 수익을 올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도 퍼지 데이에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집안 곳곳에 방범장치를 설치한다. 그리고 퍼지 데이 당일 제임스는 가족과 함께 퍼지 데이가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도한다. 그러던 중 CCTV를 보고 있던 제임스의 아들 찰리는 길거리에서 살려달라고 고함치는 흑인 노숙인을 보고 그를 집으로 불러 숨겨준다. 제임스는 신분도 모르는 낯선 사람이 가족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내와 함께 노숙인을 찾는다. 그런데 갑자기 가면을 쓴 집단이 집 앞으로 찾아와 노숙인을 내보내라고 한다. 그들은 퍼지 데이를 지지하는 상류층으로 보였고 길거리 노숙인들을 노리는 살인에 굶주린 살인마로도 보였다. 노숙인을 보내지 않으면 그의 가족까지 살해하겠다고 위협하자 제임스는 그 노숙인을 내보내야 한다며 그를 찾아다녔다. 찰리는 그 흑인이 제임스에게 끌려가지 않도록 끝까지 도왔지만 결국 잡히고 만다. 제임스는 노숙인을 내보내려고 하다 문득 ‘왜 죄 없는 사람을 죽여야 하지?’ 라는 생각을 하고 집 밖의 살인마들과 싸우기로 결심하지만 그는 결국 총에 맞아 죽는다. 다른 가족들도 위기에 처하지만 이웃사람들이 그들을 구해준다. 하지만 그들도 제임스 가족을 살해하기 위해 찾아온 집단이었다. 그들은 제임스가 방범장치로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에 평소에 상냥하게 대했지만 퍼지 데이에 마침 제임스의 집이 열렸기에 제임스 가족을 직접 죽이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가족들은 다시 한 번 위기에 처했지만, 그 순간 찰리의 도움을 받은 노숙인이 이들을 제압하여 가족들을 구한다. 퍼지 데이는 이렇게 끝났다.
 

 사실 나는 다른 누구에게 ‘더 퍼지’ 라는 영화를 정말 추천하고 싶지 않다. 다른 스릴러 영화들과 비교해도 영화의 작품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고, 결말도 허무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면을 통해 이 영화를 소개하는 것은 ‘퍼지 데이’가 사회에 전달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평상시 사람들은 직장에서 동료들과 열심히 일도 하고, 이웃과 대화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기도 한다. 즉 퍼지 데이가 오기전까지 사회는 범죄율이 1%에 이를 정도로 평화롭다. 하지만, 12시간 동안 벌어지는 범죄는 살인 같은 중범죄가 대다수다. 범죄의 종류와 규모가 그들이 평상시 참아왔던 범죄욕구에 비례한다고 보면, 그들이 평상시 진심으로 평화롭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것 같다. 즉, 퍼지 데이는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일상’을 보여준다.
 또한, 퍼지 데이 기간동안 사람들은 크게 3종류의 사람으로 구분되는데, 첫 번째는 밖에서 범죄를 일으키는 범죄자, 두 번째는 집 안에서 범죄를 피하는 대피자, 마지막은 거리에서 범죄에 희생되는 희생자이다. 평상시 모두 같은 미국의 시민이었을지라도, 퍼지 데이에 사람들은 철저하게 분리된다. 즉, 퍼지 데이는 ‘인간관계의 분리’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퍼지 데이는 ‘개인주의가 초래할 비극’을 보여준다. 영화 본문 중에서 제임스와 찰리가 노숙인을 두고 갈등하는 장면이 있었다. 제임스는 가족을 위해 노숙인을 밖으로 내보내려했고 찰리는 그가 희생되는 것을 막았다. 비록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 였지만 제임스는 타인에게 희생을 요구했다. 허나 이 부분에서 제임스를 비판할 수만은 없는 것이 가족이 자신에게 더 중요한 우선순위였고, 그 때문에 타인을 희생을 바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찰리를 살리고 제임스를 죽였다는 점에서 ‘공동체주의’의 손을 들어줬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영화가 우회적으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경계하고 비판한다는 것도 보여준다.

영화는 점점 개인주의화 되고 있는 현대 사회가 ‘더 퍼지’ 속의 비극적 사회처럼 변해갈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물론, ‘범죄를 합법화하는 사회’가 도래하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개인주의가 극적으로 갈 때 사회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개인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할 수 는 없는 일이지만, 공동체의식을 회복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임지윤
(해양환경·생명과학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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