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人間), 만남의 존재
인간(人間), 만남의 존재
  • 한상준
  • 승인 2015.02.2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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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첫 수업시간을 맞추기 위해 스쿨버스를 기다렸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스쿨버스는 제 시간을 시키지 않고 비탈진 방파제 길을 향해 달려온다. 아저씨를 욕할 수도 교수님께 변명할 수도 없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시작하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수업시간, 그리고 건조한 친구와의 대화를 술과 함께 하고 돌아오는 길은 더 없이 허무하기만 하다. 어디 그뿐이랴 막막한 미래는 나 혼자만의 막다른 길이 아니라고 메스컴 에서는 떠들어 대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고, 칠흑 같은 겨울밤은 나의 내일 같이 차갑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나의 걸음이 찾아온 곳은 나의 집, 포근한 가족의 온기가 느껴지는 나의 가정. 나는 오늘도 나의 가정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가정이란 무엇인가? 왜 몸이 지치고 마음이 힘들면 가정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모두가 가정이라는 곳에 따뜻한 온정과 나의 마음을 보듬어줄 그 누군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은 가정은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라고 규정하였다. 샤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말을 빌리자면 ‘실존이 본질에 우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에 의해 존재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는 곳이 가정이며 집이라는 것이다.


 소극적인 성격에 특별한 재능도 없고 성적도 어중간하고 취업이 불투명하면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는 인정받거나 사랑받기 힘들다.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해 사회를 이루는 목적에 부적합한 존재는 선택받지 못한다. 하지만 가정은 그렇지 않다. 가정은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사랑과 존중을 받는 곳이 가정이라고 마르셀의 존재론은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공부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취업에 적극적이지 않으면 가정에서 나무라거나 다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반응은 우리의 ‘있음’이라는 존재를 부정하거나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나의 그런 모습이 사랑 받지 못할 조건이 된다면 나의 부모님의 재산이 없음과 권력자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부모님에 대한 존재를 거부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가족이 서로의 조건에 의해 사랑하고 혹은 미워한다면 그건 가정이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조건의 문제 때문에 불행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체코의 천재작가 프란츠 카프가(Franz Kafka, 1883~1924)가 쓴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의 가정은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물들어 살아가는 우리 가정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났을 때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벌렁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활 모양의 각질(角質)로 나누어진 불룩한 갈색 배와 가르다란 여러 개의 다리가 눈앞에 허위적 거리는 모습으로 변신(變身)한 모습에 경악한다. 가정에서 유일하게 경제적 활동을 하며 가족을 봉양하는 그레고르는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길 노력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사랑과 연민은 사라지고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부모와 그의 형제도 그레고르를 통해 차츰 변신을 해가는 모습 또한 그려진다.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던 그의 조건이 사라지면서 가족의 사랑과 존중은 차츰 사라지기 시작한다. 처음 오빠를 돌보던 누이동생도 ‘이 괴물 앞에서 내 오빠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겠어요.... 그 누구도 우리를 눈꼽 만큼 이라도 비난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라며 해충이 된 오빠를 없앨 계획을 세운다. 결국 그레고르는 가족의 냉대와 폭력, 증오 속에서 고독하게 죽어간다. 흉측한 모습과 함께 더 이상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에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목숨을 끊는다. 그러자 가족은 슬픔보다는 신께 감사를 드리고 악몽 같았던 여러 달간의 고통 속에 미뤄왔던 가족 나들이를 가게 된다. 그레고르가 사라진 가족은 새로운 희망을 성숙해져 가족을 부양할 만해진 여동생으로부터 다시 찾으며 카프카의 소설《변신》은 끝이 난다.


 자본주의의 마성은 사회적, 도덕적, 예술적, 종교적 가치를 오직 하나의 가치인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게끔 바꾸었다. 그 결과 인간관계 심지어 가족관계마저도 경제적 가치로 가족을 대하도록 우리의 패러다임을 조장한다. ‘얘 넌 돈 되는 일을 좀 해라~’, ‘이렇게 해서 밥벌이 하겠니?’ 나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의해 나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끝없는 탐욕은 사람을 존재로 보지 않고 돈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보게 만든다. 유산 때문에 부모님을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신의 배우자를 살해하는 사건을 심심찮게 뉴스를 통해 듣게 된다.


 우리가 흉측한 해충에서 인간으로 변신하기 위해선 마르셀의 철학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선 가족적이어야 한다.’ 마르셀은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공동체를 인간(人間) 존재의 출발이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부모님’, ‘부모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나’, 즉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상호적 관계의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비로써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가족을 넘어 사회로까지 확장이 된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 의미 자체가 사람과 사람(人) 사이(間)에 살아가야하는 사회적 존재, 상호 관계적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사람은 조건(spec)에 의해 사랑 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being)로 사랑 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카프카《변신》은 자본에 휩쓸려 점점 벌레로 변태하는 우리의 공동체인 대학과 사회를 향해 이야기한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가족적 이어야한다”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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