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 선배] 선장에서 법학 교수가 되기까지
[기자가 만난 선배] 선장에서 법학 교수가 되기까지
  • 김기섭 수습기자
  • 승인 2015.06.0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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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도전의 연속이라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다

 이번<기자가 만난 선배>코너에서는 고려대학교 법학전문 대학원 교수 김인현(항해학과·34기) 동문을 만났다. 해양대학 출신 최초로 고려대의 종신교수가 되고, 고려대, 김&장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우리대학에서 배운 자부심과 강한 책임감, 그리고 ‘선장이라는 타이틀’이라고 말하는 김인현 동문. 선장 출신의 교수로서 우리나라의 해상법을 동아시아의 최고로 만들기 위해 오늘도 힘쓰고 있다는 그를 만나보았다.

 

“지금과 사뭇 달랐던 그 때 그 시절 해양대”
 김 동문이 해양대에 재학하던 당시에도 적도제 하면 당연 포크댄스였다. 포크댄스는 해사대학의 남학생들이 같이 춤을 출 여학생들에게 파트너 신청을 하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행사이다. “당시 해양대에는 남학생들만 있었다”며 “1학년들은 여학우들이 없었던 학교를 벗어나 포크댄스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아치섬 밖으로 나가야 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학년이 높아질수록 포크댄스를 포함한 축제 참여율이 저조했는데 김 동문도 딱 1학년 때까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그 때만큼은 즐겁게 놀았다”고 전했다. 또한 당시 해사대학 학생으로서 시도해봤던 일탈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동문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당시엔 해사대학생 전원이 ROTC(학생군사교육단)이었다"며 "장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탈을 할 수도 없었지만 일탈을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답했다. 제복을 입었을 때 느끼는 자긍심과 명예를 생각하면 타 대학 학생들처럼 사복을 입고 자유롭게 생활하지 못한다는 아쉬움 정도야 상관없었다.

 

“가슴 아팠던 사고, 그리고 결심”
  김 동문은 졸업 후 선사에 취업하여 배를 탔다. 선사는 당시 해사대학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선사들 중 하나였던 일본의 ‘산코라인'이었다. 그리고 김 동문은 1990년 12월 28일 입사 11년 만에 선장으로서 Sanko Harvest에 승선하여 항해를 떠났다. 그런데 미국에서 호주로 항해하는 도중 호주 근처에서 암초와 부딪치는 좌초사고를 당했다. 매우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사상자는 없었다. 사고 이후 김 동문은 실의에 빠졌고, 얼마지나지 않아 사고 처리를 위해 호주에서 진행되는 소송에 증인으로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김 동문으로서는 힘든 시기였지만 우리대학 출신으로서 그리고 선장으로서 용기를 내어 사고 처리를 위해 호주 법원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그 현장에서 김 동문은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정했다. 김 동문은 “당시 호주 법정으로 갈 때 주변에서 조언을 얻으려고 했지만 당시 해상법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갖춘 사람이 없었다”며 “반면 영국 측에서는 해상법 전문 변호사도 있고 해상법에 대해 꽤나 잘 알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김 동문은 우리나라의 해상법이 영국과 같은 해양 선진국에게 크게 못 미친다고 생각했다. 호주 법정을 나오며 김 동문은 혹여 자신과 비슷한 사건을 겪은 선원, 선사들이 생긴다면 도움을 주고 싶어 해상법에 뜻을 품기 시작했다.


“국내 최대 법률사무소에 잔류하지 않고 배움의 장을 선택하다”
_ 김&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국내 대표 법률사무소였다. 당시 김&장에
서는 선장 출신의 법조인을 원하고 있었고 적임자인 김 동문에게 업무제의를 했다. 1995년 9월부터 김 동문은 김&장에서 선장으로서 해사자문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김 동문은 충분히 재능과 실력을 펼칠 수 있는 직장이 있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좀 더 많은 것을 그리고 좀 더 깊이 있는 것을 배우고 싶어 했다. 1996년 9월 김 동문은 고려대 대학원 법학과 박사과정 상법전공에 입학한다. 하지만 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학위를 공부했던 것은 아니었다. 김 동문은 “석사, 박사과정을 거치면서 나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 보다 굉장히 학구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당시 목포해양대학교에서는 해양경찰학과가 신설되어 학생들을 지도할 교수를 찾고 있었고 김 동문과 연락이 닿았다. 또한 그는 “주변 선배들로부터 지방의 국립대라고 해도 교수가 되면 다양한 법학강의와 더불어 평소엔 할 수 없었던 활동들도 마음껏 할 수 있다 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박사학위과정과 병행하던 김&장에서의 생활도 마무리 짓고 목포해양대학교로 갔다.

 

 

▲ 기자의 질문에 상세하게 답변을 하고 있는 김인현 동문

 

“목포해양대 교수, 대학생이 되다??”
  7년 6개월. 그 짧지 않은 기간동안 김 동문은 목포해양대에서 학생들을 지도하였고 2014년 김 동문의 제자 4명이 로스쿨 입시에 합격하는 성과를 이루었고, 김 동문 스스로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국제해사기구(IMO) 한국대표단에 합류하여 선주책임제한조약, 여객운송을 위한 아테네 조약, 난파물제거협약 등 여러 조약을 성안하는 자리에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그런데 김 동문이 한국을 대표하여 국제회의에 참여하는 일이 많아지고 미국 텍사스 법과대학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기초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 해상법 발전에 기여를 하겠다고 했던 김 동문은 해상법을 전공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즉, 해상법의 기초가 되는 민법, 상법과 같은 일반법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지만 당시 느꼈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47세의 나이였지만 김 동문은 학사편입 시험을 준비하였고 03학번으로 2005년에 3학년으로 고려대학교 법대생이 된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진 목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수업이 없던 목요일과 금요일, 또는 계절학기를 통해 자신보다 20년은 더 어린 학생들과 같이 강의를 듣기도 했다. 만만치 않았던 이중생활 이었음에도 2년 동안 성실하게 기초를 다진 김 동문은 2007년 고려대 법학사 학위까지 받으며 학사부터 박사까지의 법학 학위를 모두 취득하게 된다.

 

 

“내가 몸 담을 수 있는 한 가지를 찾았다면 올인하라”

 

▲ 한국해상법 관련 책에 대해 설명하는 김 동문

 

 

김 동문이 지나온 지난 50년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감당하기 힘들었던 일들 속에서 그는 항상 상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사고를 당했을 때도 절망하고 좌절감에 빠져있지 않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항상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성실함과 책임감을 가지고 해쳐나갔다. “법학은 천재가 되기를 요하지 않는다. 다만 성실함을 갖추고 10년 20년을 한 분야에 올인 할 수 있는 사람을 요할 뿐이다. 그런 사람은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김 동문. 그는 효율성만 따지고 단기간에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다른 사람이 한 시간 투자할 때 두 시간 투자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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