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연민 받아야만 하는가.
그들은 왜 연민 받아야만 하는가.
  • 강준 (동아시아학과 08)
  • 승인 2015.08.31 16: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_이주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시선

 

▲ 강준(동아시아학과 08)
 _ 3년 전, 부산 변두리의 ‘녹산’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과제의 일환으로 방문하긴 했지만, 교수님의 격려대로 ‘내가 열심히 준비하는 이 과제가 지역의 경제와 문화를 살리는 일.’이라 여기며 의욕적으로 덤벼들었다. 당시 녹산은 공단으로 조성되며 어느 지역보다 이주노동자의 수가 급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주민을 매개할 어떠한 방식을 고안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며 여기저기 인터뷰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 과정에서 매우 놀라웠던 것은, 주민들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식이 결코 좋지 못했다는 점과 이주노동자들의 삶도 인터뷰조차 기피할 만큼 중심에서 제외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주민들의 반응은 얼추 예상했었지만, 이주노동자 대다수가 애써 주민들과 화합할 의사가 없다하더라도 인터뷰까지도 거절하다니, 약간의 충격 속에서 몇 달간의 과제를 마무리 지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에서야 되돌아보니 나를 쳐다보던 이주노동자들의 눈빛을 적대적이라고 느꼈던 것은, 아마도 인터뷰를 요구했던 나의 태도 또한 주민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기억에서 애써 지워버린 일이지만, 이러한일은 우리 삶 안에서 무수히 반복되고 있다. 굳이 후(後)식민과 같은 거창한 언어를 쓰지 않더라도, 다문화주의를 외친다고해서 진정으로 내 삶 안에 그들이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강화시키는 것은 미디어이다. 미디어가대량으로 유포하는 다문화주의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람들이, 또 다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단순한 관찰의 대상이나, 연민의 대상으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영화중의 하나가 바로 ‘의형제’이다. 주목받는 배우와 흥미로운 소재로 흥행을 거둔 영화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선 남파공작원과 전직 정보요원이라는 특수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이주결혼여성을 쫓아야만 하는 영화상의 현실이, 현재 한국의 다문화주의가 지닌 문제를 목도하게 만든다. 이 남파공작원(혹은 새터민)을 다문화주의에 입각해 외국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견차가 있겠지만, 분단으로 재편된 역사의 굴레가 삶의 반경을 폐쇄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이들은 머나먼 타자이고, 우리 내 삶의 중심에 놓여있지 못하는 디아스포라라고 정의하는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같은 민족이면서도 ‘우리’라는 소속감을 부여받지 못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여타 외국인의 이야기보다 멀리 놓여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영화에서 남파공작원 지원(강동원 役)과 이주여성이 극도로 자제된 대사만을 사용하는 것이나,(심지어 이주여성의 대사는 없거나, 남성이주노동자의 언어는 해석 불가한 방식으로만 제시된다.) 카메라가 이주여성의 얼굴을 비출 때, 극도의 close-up으로 보는 관객에게 일종의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위의 상황을 반증하는 하나의 기법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는, 같은 듯 매우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타인으로 치부되는 사람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우리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그들을 ‘포용’하자고 말한다. 잊혀진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에 비판을 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등한 입장에서 그들을 대하는 것과 테두리 밖의 타자, 즉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처럼 한국의 미디어에서 전통적으로 비(非)서구사회를 담아낼 때 사용한 전형적인 방식은 ‘연민’ 혹은 ‘신기’의 이분법적 구조였다. 다른 말이 아니라, 이러한 방식의 전제는 ‘우리’에 포함되지 못하는 모든 타자에 대해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이 차이에 대한인정이 아니라 하나의 테두리에 강제적으로 편입시키려는 폭력적인 방식만을 구사해왔다는 것이다. 이렇듯 아직 다문화주의에 대한 진정한 통찰이 부족하고, 개개인의 열린 자세가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서 동등한 관계로의 연대를 기대하는 것은 이르기만 하는가. 우리는 모두 따뜻한 사람이다. 그가 옆에 있는 누구든, 녹산의 동남아시아 이주노동자이든 모두가 따뜻한 사람이다. 자신보다 못났다 여겨 쓰다듬을 권리도 없고, 무조건적인 윤리의식으로 그들을 우리 삶의 테두리로 밀어 넣을 필요도 없다. 그들에게서 발생하는 문제를 무마하기 위한 다문화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재구성하기 위한 다문화주의를 내세우자. ‘그들은 왜 슬플까?’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은 왜 연민 받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생각해보자. 진정한 다문화주의에 대한 논의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