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 그날 속으로
5월 광주 그날 속으로
  • 편집부
  • 승인 2009.05.1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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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주 그날 속으로

 미리 가보는 순례지



전남대학교 정문



 5월 17일 자정 불법적인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따라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밤을 새워 학문에 몰두하고 있던 학생들을 무조건 구타하고 불법 구금했다. 18일 오전 10시경,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이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게 항의하면서 최초의 충돌이 있었으며, 학생들은 광주역과 금남로로 진출해 항의 시위를 벌렸다.
퍌 도청
 계엄이 불법 확대되면서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공수부대는, 집단 발포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광주시민들의 결사항전에 쫓겨 5월 21일 오후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였다. 이 후 이곳에서는 항쟁지도부가 활동하였고,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수습책을 논의하는 등 시민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5·18 민주광장



 5월 18일 이전 3일 동안 학생과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대규모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시국선언문을 발표,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화를 촉구하였다. 5·18광주민중항쟁 정신을 낳은 산실이다. 



금남로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5·18광주항쟁 기간 중 연일 격렬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거리다. 


상무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희생자들의 주검을 임시 안치했던 곳이다.
 5·18광주민중항쟁 기간 동안 광주시민들은 줄지어 분향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면서 민주화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퍐 광주 MBC 옛터
 계엄하에서 군부의 검열을 받던 언론은 항쟁 열기는 물론 계엄군의 과잉진압 행위마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아 시민들의 빗발치는 항의를 받았다. 시민들이 진상을 사실대로 보도하라고 거세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5월 20일 밤 광주MBC, 다음날 새벽 광주 KBS 건물이 불탔으며 광주세무서 건물에도 불길이 올랐다.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계엄군에 대한 항의요, 응징이었다.




  녹두서점 옛터
 유신체제 말기 암울한 시대에 민주 청년 학생들이 모여 열띤 시국 토론을 벌이던 사랑방.
 항쟁 기간 중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활동하던 강학들과 노동자들도 이곳을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그들이 발행하던 `투사회보'를 제작해 광주시내에 살포, 광주민중항쟁 소식을 시시각각 시민들에게 알렸다.




   5.18 구묘지


 이곳은 5.18민중항쟁 당시 산화한 영령들이 묻힌 곳으로 망월동 묘지라 불려왔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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