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상주(喪主)였습니다
저는 상주(喪主)였습니다
  • 편집부
  • 승인 2009.06.1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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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상주(喪主)였습니다

양 재 영
해양행정학과·4



 간만에 늦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잠에서 깨는 둥 마는 둥 하며 받은 전화는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서거 소식을 전해주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잠결에 헛소리를 들은 것인지, 노 전 대통령님의 서거소식은 조금도 현실감이 없었다. 하루 종일 멍하니 뉴스만 보고 있는데, 점점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슬픔? 분노? 하나의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그 감정이 너무 복잡했다. 마음은 정리가 되지 않았고, 브라운관 속의 풍경은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았다. 어쩔 줄을 모르던 내게 문자가 왔다. 현재 내가 소속되어 있는 민주당 대학생 사업단에서 봉하마을로 자원봉사를 하러 간다는 문자였다. 뒤도 돌아볼 것 없이 곧장 짐을 챙겼고 24일 저녁, 나는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습한 바람이 불어오는 진입로의 한편으로는 촛불들이 늘어서 있었고, 늦은 시각임에도 수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먼저 분향소를 찾았다. 분향소에 있는 노 전 대통령님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는데, 그 순간마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분향소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내 뒤로 술에 취한 조문객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노 전 대통령님의 서거에 대한 슬픔과 현 정부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그 고함 소리는 봉하마을의 비통한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 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가는 그런 기분으로 나는 5박 6일 동안 봉하마을에서 숙식하며 자원봉사활동을 했다. 나는 주로 분향소 앞에 서서 분향소를 찾아오신 조문객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분향소로 입장시켜드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낮이고 밤이고 분향소를 지키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격정적인 슬픔과 분노가 치솟기도 하는가 하면, 차분하게 과거를 회상하며 노 전 대통령님을 떠올리기도 했다.

감정의 기복 중에서도 일관되게 남아 있던 감정은 바로 `상실감'이었다. 내가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자 한 시민이 내게 다가와서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라고 속삭이셨다. 갑작스럽게 위로를 받은 나는 그 분의 손을 잡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다. 자원봉사자로서의 수고로움 때문이 아니라, 같은 상실감을 가진 사람들로서 서로를 위로했다. 이와 비슷한 일을 이후에도 몇 차례 겪으면서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자격으로 이곳에 와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상주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이곳에 찾아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남의 초상집에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상주가 되어, 서로의 슬픔을 위로하고 감싸 안았던 것이다.

 발인식이 되어서야 대통령님의 서거가 몸으로 와 닿았다. 흩날리는 노란색 종이비행기 사이로 대통령님의 영구차가 지나갈 때, 비로소 눈물샘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큼은 슬픔을 주체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장례 절차를 마친 마지막 날 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서울 분향소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하던 유시민 전 장관님께 한 시민이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이 상주요?" 유 전 장관님께서 그렇다고 하자 그 시민은 "나도 상주요" 하고 가버렸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노 전 대통령님의 서거는 남의 초상집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상주였음을 말이다. 봉하마을에 다녀오자 주변사람들이 가서 무엇을 했느냐고들 물었다. 그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봉하마을에서 저는 상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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