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과 나눈 한류(韓流) 이상의 인정(人情) 
몽골과 나눈 한류(韓流) 이상의 인정(人情) 
  • 이홍원 기자
  • 승인 2010.09.01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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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란바타르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의 테를지. 저녁무렵의 어둑신한 숲속에서 갑자기 웬 사내가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북한사투리도 연변말도 아니고, 정확한 서울말투다. 순간, 마음을 놓아야 하는지, 긴장해야 하는지 판단이 어렵다. 일단 짧게라도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센벤오(안녕하세요)"그러자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며 다가들어 이편의 등을 두드린다.

 내쳐 사내의 입이 쏟아낸 것은 득의양양한 성공담이었다. 경기도 이천의 가구공장에서 5년간 일을 해서, 돈도 벌고 차도 샀으며, 그때 배운 기술로 몽골에 돌아와 가구공장을 내어 일익번창 중이라는. 어느 겨를엔가 옆에 모여든 아내와 아이들, 종업원인 듯싶은 사내들 모두 동감을 곁들여 웃어보였다. 그들이 몰고 온 차스타렉스의 라디오 방송이 한국 최신유행가를 틀자 모두가 익숙하게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시리게 찬 냇물이 흐르는 강가를 따라 내려오다 술판을 벌인 일행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내도 한국에서 번 돈으로 차를 사고, 오토바이 사고, 가게를 열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가 내민 보드카와 양고기를 받아들고야 내심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한국에서 고생하지 않았나요?"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한국인의 몰인정한 처사를 알기에 던진 질문에, 그는 짧고 밝게 답했다. "아니요. 좋았어요. 다시 가고 싶어요"

 몽골은 가깝고 친숙하다. 7월 26일에도 서울 모신문사가 주관한 대학생 친선교류단 1백 90명이 무리를 지어 자연사박물관과 역사박물관 등을 헤집고 다녔다. "한국사람으로 도로를 포장했다"는 농담이 실없이 들리지만은 않았다. 서방 선진국가에 이어 뒤늦게 자원외교에 나선 한국이 몽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정도는 누구나 입에 올리는 화제였다. 교민들이 내는 잡지는 한국의 전직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몽골방문 소식을 재탕 삼탕해 싣고 있었고, 실은 이번 여름에 대통령이 방문할 예정이었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하지만 앞으로 몽골이 얼마나 더 가까워질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언제까지 한국산 자동차와 일상용품이 인기리에 팔리고, 라디오방송에서 한국노래가 흘러나오며, 한국음식을 최고의 손님접대코스로 여겨질지 알 수 없었다. 한국산업계가 몽골의 값싼 인력을 선호하고, 한국정부가 몽골의 막대한 자원 개발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두 나라가 진정 가까워지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한국해양대 봉사단이 도착한 7월 24일 울란바타르대학에는 앞서왔던 K대 팀이 떠날 채비를 차리고 있었고, 하루 이틀 새 Y대 팀과 S교회 의료봉사진 B교회 선교단이 입사해 활동에 나섰다.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이 학교야말로 한국인의 몽골 접촉의 베이스 캠프였다. 듣기로는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간은 밀려드는 봉사단 안내로 대학직원 대다수가 하루 5시간 잠자기조차 어렵다 한다.

 이곳에서 필자가 만난 인연도 각별했다. 논문으로만 만나던 몽골학자와 몽골어전문가 외에도 16년 전 출강하던 서울 모대학 문창과 조교가 어엿한 중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되어 필자를 맞았다.

 캠퍼스 안에서 3일간 몽골학생을 대상으로 행한 한국어와 영어, 컴퓨터, 태권도 교육은 순조로왔다. 노트도 안 들고 나타나는 학생들이 한편 못미덥지만 그들의 암기력이나 눈썰미는 생각 밖으로 탁월했다. 몽골의 발전, 자본주의화 속도가 예상을 초월한 것과 무관치 않을 듯 했다.

 하지만 게르지역, 도시 빈민가에는 역시 그늘이 깊었다. 징길테구 산19-1064번지 순재 할머니는 월보조금 9만원으로 자식 오남매가 맡긴 손자 일곱을 돌보느라 힘겹게 살고 있었다. 거대한 능 같은 뒷산이 언제든 무너져 내릴 8부 능선의 게르에서 봉사단은 울타리를 보수하고 장판을 깔고 식량을 채우고나서 5만원을 놓았다. 자신은 심장병과 관절염으로 고생하면서도 순재 할머니는 그걸로 손자들을 위한 DVD를 샀다. 같은 징길테구 떠트셀흐트 11-220 자르갈사하는 영낙없는 70객 노파였지만 실제론 49세 중년여인이었다. 딸 둘과 남편, 아들 셋 모두 마땅한 벌이가 없어 그녀가 주운 캔과 페트병으로 연명한다는 살림형편은 더 내려설 곳이 없는 바닥이었다. 담이 없는 가난한 집에서 봉사단은 나무판자로 울타리를 치고 지붕에 기름종이를 덮어줬다.

 그 밖의 집들도 사정은 엇비슷했다. 젊은 나이에 술과 노역으로 세상을 등진 지아비를 대신해 아낙들이 자식을 키우며 신산스레 살고 있었다. 이들이 가난을 벗어던질 가능성은 극히 적어보였다.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해가고 교육받을 기회는 없는데 도움을 줄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한시가 급한 물건을 채워주고 종일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는 한국인 봉사단원들 앞에서 자존심 강한 몽골인들도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동행했던 몽골 대학생들도 그제야 자신들도 못한 일을 한국인들이 했노라고 인정했다.

 그래서였을까. 사막이 날로 넓어진다는 몽골에 문득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한국 학생들과 담뿍 정이 든 몽골학생들은 마지막 날 밤 송별회식을 끝내고도 돌아가지 않았다. 기숙사에서 함께 밤을 보내고 공항에 배웅을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짐 정리를 못했다며 물러서는 쪽은 되레 한국학생들이었다. 급기야 기숙사 한 칸에 30명이 몰려 밤을 보낸 양국 학생들은 이튿날 새벽 네 시, 함께 기숙사를 나섰다. 하지만 버스는 15분 만에 멈춰 섰고, 급히 끌고 온 소형버스는 한국학생들 타기에도 좁았다. 결국, `무지개 나라'에서 왔다는 사람들은 늦가을 같은 새벽 추위 속에 고장난 버스와 몽골학생들을 버려둔 채 부리나케 공항으로 내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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